갈릴레아 호수의 일출 |
사람이 움직이는 이유가 있습니다. 행동의 원인이 되는 것이 있지요. 주말에 집구석에 틀어박혀 한 번도 꿈쩍 않던 남편이 어느 날 갑자기 밖으로 나들이를 혼자 나가겠다고 하면 그를 이끄는 무언가가 있는 셈입니다. 그것은 그가 좋아하는 무언가이겠지요. 친구와의 술자리 약속이거나 아니면 바람이 난 것일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그의 평소의 기호를 통해서 지금의 행동을 분별할 수 있고, 또 그가 어떻게 행동하게 될지도 알 수 있습니다. 돈을 좋아하는 사람은 돈이 오가는 것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하지만 그 밖의 다른 일들에는 무덤덤하지요. 가난한 이가 찾아와서 호의를 베풀어 달라고 하면 거절하지만 부자 동네의 부자 사람이 찾아와서 뭔가를 청하면 그에 상응하는 것을 기대하면서 그 호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래서 속이 뻔히 보이는 일을 그렇지 않은 것처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숨은 속내를 감추기 위해서 마치 올바르고 선한 일을 하는 듯한 연출을 하곤 하지요. 그렇게 그들의 ‘위선’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하느님에게 아무 관심이 없으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척을 하고, 하느님의 직분에 종사하기도 하는 이들, 선과 사랑에 관심이 없고 자기 이름을 드높이는 데에만 관심이 있으면서 자신이 하는 일이 마치 가난한 이들을 사랑하기 위한 것이었다는 듯이 드러내는 이들, 세상에는 그런 저런 위선자들이 존재합니다.
사제를 만나는 것은 즐기면서 가난하고 소외된 이를 만나는 것은 꺼리는 이들, 남편과 자식은 구박하면서 수도자 앞에서는 순한 양이 되는 이들, 우리는 그런 이들을 주변에서 쉽게 찾아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가 된다는 것은 ‘사랑’이 우리를 움직이는 근본적인 동기가 될 때를 일컫는 것입니다. 사랑이면 움직이고 사랑이 아니면 움직이지 않는 이들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이라 불리는 사람들이고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사람들입니다. 물론 이것이 쉽게 이루어지지는 않습니다. 우리는 아직도 수많은 세상의 동기를 지니고 살아가게 마련이기 때문이지요. 부자도 되고 싶고, 미남 미녀도 되고 싶고, 인기도 얻고 싶고, 권력을 쥐고도 싶습니다. 그 모든 것들을 바로 ‘나 자신’을 위해서 이루고 싶은 것이지요. 그래서 예수님은 당신을 따르기 위한 선결 조건으로 먼저 ‘자기 자신을 버리고’라는 말씀을 하신 것 같습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동기가 되는 사람, 그는 바로 하느님의 나라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육신을 입고 사는 동안은 여러가지 시련이 겹쳐 다가올 것이지만 훗날 우리가 온전히 자유롭게 되는 날 우리는 참된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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