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십시오, 이 아기는 이스라엘에서 많은 사람을 쓰러지게도 하고 일어나게도 하며, 또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도록 정해졌습니다. 그리하여 당신의 영혼이 칼에 꿰찔리는 가운데, 많은 사람의 마음속 생각이 드러날 것입니다. (루카 2,34-35)
제가 강론대에서 ‘술을 과하게 마시지 말라’고 가르치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등장합니다. 한 부류는 저의 이 말에 은근히 기뻐하는 이들입니다. 딱 봐도 술 퍼마시는 남편 때문에 고생하는 이들이지요. 여성들과 아이들입니다. 반대의 부류는 기분 나빠하는 부류들입니다. 즉, 술을 과하게 마시고 있는 이들이지요. 제가 그 주제로 사람들을 가르치는 내내 사람들의 표정에 그러한 경향이 더욱더 드러나게 됩니다. 숨길 수가 없는 것이지요.
예수님이 오신 것은 물론 우리 인류를 구원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를 죄의 속박에서 구하고 참된 빛을 전해주기 위해서 오신 것이지요. 하지만 이로 인해서 두 부류가 갈라지게 됩니다. 즉, 죄에서 구원되기를 간절히 기다리는 부류 하나와, 아직도 죄를 짓고 싶어하는 부류 둘이지요.
정말 간절히 구원을 기다린 이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는 진정으로 기쁜 소식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여전히 죄를 즐기고 있는 이들에게 예수님은 ‘성가심’이고 ‘귀찮음’이고 ‘거북함’일 뿐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할까요? 예수님의 오심이 정말 기쁨이고 빛으로 느껴지나요? 아니면 정반대로 거리낌이 느껴지나요? 바로 이것으로 우리의 본심을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나아가 이 예수님을 따르려는 이는 누구나 예수님이 당한 운명에 동참하게 됩니다. 즉 ‘반대를 받는 표징’이 되는 것이지요. 세상은 자신들이 허용한 선 이상을 넘어오면 사정없이 공격을 감행합니다. 자신의 자리를 지켜내기 위해서이지요. 그래서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에 대해서 그들은 공격을 합니다. 왜냐하면 누군가를 빛으로 초대하기 위해서는 그들이 휩싸여 있는 어둠의 장막을 걷어내어야 하기 때문이지요.
사람들은 정서적으로 안정을 주는 부드러운 말을 듣기 좋아하지만 실제로 자신의 삶을 바꿀 수 있는 충고를 듣고 싶어하진 않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의 봉헌때부터 이 사명에 대한 예언을 받았고, 그것을 아는 어머니는 주님과 함께 고통 당하셨습니다. 영혼이 칼에 찔리는 고통을 말이지요. 헌데 이렇듯 주님의 고통에 동참한 어머니를 무시하려는 이들이 있다는 것 또한 슬픈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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