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난한 이들은 가르침을 빨아당깁니다. 그냥 듣는 것으로 부족해서 온전히 흡입하지요. 반면 부유한 이들은 의심하고 봅니다. 그리고 재미난 흥미거리나 있으면 반응을 보이곤 하지요. 그 둘의 결과는 너무나도 다른 것입니다. 그저 귓잔등으로 들은 가르침은 마음에 하나도 남지 않습니다. 하긴 한국에는 너무나 많은 가르침들이 풍부하게 있어서 인터넷을 조금만 뒤져도 심심찮게 오늘의 강론과 필요한 영성글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가난한 이들은 딱히 들을 것도 없고 볼 것도 없는 마당에 이방인 선교 사제가 와서 전하는 하느님에 대한 가르침을 목마른 사슴이 물을 마시듯이 마시는 것입니다.
부유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더 많은 가르침이 아니라 실천입니다. 가난한 이들은 자신의 삶 자체로 이미 수난과 시련이라는 것에 익숙해져 있기 때문에 남은 것은 누가 와서 ‘정돈’해 주는 것 뿐입니다.
오, 복된 가난이여.
가난 자체는 고통임에 틀림없지만 가난을 통해서 배울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이 존재한다는 것도 부정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음식의 참된 맛과 소중함을 깨닫게 되는 것은 배고플 때이지요. 배가 부르면 더욱 쾌락적이고 향락적인 음식의 면모를 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누가 하찮은 음식을 접대한다고 해서 거기에 감사하지도 않지요.
한번은 2011년도에 첫 휴가를 나가서 특강을 부탁하는 본당에 찾아가 제가 볼리비아에 사는 이야기를 하고 미사를 마치고 회식 자리에 간 적이 있었습니다. 저는 아직도 그 본당 간부의 교만에 가득찬 눈빛과 말투를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제가 마치 ‘거지’라도 되는 듯이 그저 돈이나 몇 푼 벌러 온 사람 취급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신들은 아주 고귀하고 차원이 다른 생활을 유지하고 있다는 듯이 거드름을 피우고 있었지요. 참으로 가련한 영혼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한국이 꽁보리밥을 먹던 시절에서 벗어난 것이 얼마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전히 한국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자신들의 팍팍한 삶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가난한 시절에도 작고 소박한 것으로 행복할 수 있었던 기억을 이제는 잊어버리고 더 나은 외제차와 더 고급스런 식당에서 거드름을 피우는 것으로 만족감을 얻으려는 영혼은 도대체 그 안에 무엇이 들어있단 말일까요?
예수님은 사람을 가르치는 데에 차별을 두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가난한 이들이 예수님 주변에 더 많이 모여든 이유는 그들의 마음에 예수님의 가르침이 더 빨리 가 닿았기 때문이고 더 오래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부유하고 교만한 이들은 예수님의 가르침을 한 번 의심하고 듣고, 걸러 듣기 때문에 마음에 남을 것이 별로 없었던 것이지요. 그렇게 첫째는 꼴찌가 되고 꼴찌는 첫째가 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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