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인사말 소리가 제 귀에 들리자 저의 태 안에서 아기가 즐거워 뛰놀았습니다. (루카 1,44)
아이들은 오염되지 않은 맑은 영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래서 어른들이 볼 수 없는 것을 볼 수 있는 능력이 있지요. 아이들은 동물들의 아픔에 공감을 합니다. 물론 요즘 같은 세태에는 아이들이 비정상적으로 동물들을 학대하는 지경이지만 그 아이들이 왜 그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가를 살펴보면 그것도 또 한 이해할 만 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원래 맑은 영을 지니고 있습니다. 물론 맑을 뿐 선이 들어있는 것도 아니지요. 그야말로 맑고 순수한 물과 같은 상태입니다. 향기도 악취도 나지 않는 상태이지요. 그래서 모든 것에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하게 됩니다. 특히 영적으로 말이지요.
우리가 하는 말이라는 것은 단순히 ‘소리’가 전달되는 것이 아닙니다. 그 안에 담겨진 내용이 전달되는 것이지요. 말은 단순히 소리가 고막을 때리고 달팽이관을 진동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담긴 것을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말을 듣고 나면 단순히 정보를 받아들이는 게 아니라 그 안에 함축된 것, 영적인 것을 수용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욕설을 들으면 화를 내고 축복하는 말을 들으면 감사하게 되는 것이지요.
성모님의 말 안에는 하느님의 은총을 받은 이의 감사와 찬미가 들어 있게 마련이고 이를 받아들인 엘리사벳과 그 태중의 아기인 세례자 요한은 그 영적인 충만함에 기뻐 뛰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마치 바이올린 줄이 서로 같은 음색의 줄일 때에 공명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간절히 하느님을 찾는 영혼들은 서로가 서로를 알아보는 것이지요.
그래서 성모님의 인사는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를 기뻐 뛰놀게 하였습니다. 당신의 태중의 하느님이 성모님의 목소리를 통해서 엘리사벳에게 구원의 소식을 전했고, 엘리사벳 태중의 아기는 그것을 감지하고 기뻐 뛰논 것입니다.
과연 우리는 어떠할까요? 구원의 소식을 들을 때에 우리의 영혼은 과연 어떤 상태일까요? 우리는 세례자 요한과 같이 함께 기뻐 뛰놀 수 있을까요? 아니면 무덤덤하고 무감각하게, 혹은 죄악과 양심의 가책 속에서 이 거룩한 시기를 지나고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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