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이 예수님께 “모르겠소.” 하고 대답하였다. (마태 21,27)
우리는 무엇이 옳은지 모르지 않습니다. 정반대로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언제나 두가지가 상반됩니다. 내가 생각하는 이상과 나의 실제로 사는 삶이 서로 상충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우리는 진리를 묻는 이 앞에서 ‘모르겠다’고 해버리고 맙니다.
선을 추구하고 거룩한 삶을 영위해야 하는데, 나의 욕구가 존재합니다. 그리고 그 욕구는 적지 않은 경우에 선과 거룩함과는 상관없는 곳으로 나를 이끌어가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그 둘 사이에서 선택을 해야 하는데 언제나 마음 끌리는 곳을 선택하게 됩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경우에는 욕구를 선택하게 되지요. 달리 말하면 선을 포기하게 되는 것입니다.
예수님에게 맞선 이들, 예수님에게 질문을 던진 이들은 시작부터 좋은 뜻을 지니고 있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서 질문을 했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그것을 알고 있었기에 그들의 질문에 대답하기보다는 오히려 당신이 그들에게 질문을 던지신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그들이 대답하지 못할 것을 알고 있었고 마찬가지로 당신도 대답을 기피했습니다. 진리를 진리로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의도’를 지닌 이들에게는 진리를 던져줄 이유가 없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거룩한 것을 개들에게 돼지들에게 던져 주는 것과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
사실 인터넷 상에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이 난무합니다. 그리고 그들 가운데에는 악한 의도를 지닌 사람들도 상당수 됩니다. 언뜻 정의의 사도 같지만 그냥 성질난 사람들도 있고, 제 마음에 안드는 건 무엇이든 배척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이런 이들에게 ‘신앙’이라던지 ‘영성’과 같은 것은 우스꽝스러운 대상에 불과하지요. 그들은 하느님을 믿지 못하고 믿을 수도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이 전혀 자신의 이성적 사고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그들만의 교만한 믿음을 굳게 지니고 있지요. 그러면서 실제로는 자신의 삶 하나도 올바로 추스리지 못하는 경우가 적지 않습니다.
“XXX에 반대하는 서명을 해야 합니다. XXX 사건을 잊어서는 안됩니다! XXX 국민들을 위로해야 합니다!!! 이에 대해서 인터넷 상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로서 한 말씀 해 주시지요?”
“먼저 제가 묻지요. 제가 가진 영향력이라는 것이 거룩한 분에게서 비롯하는 진실한 것입니까? 아니면 그저 인간적 사고에서 나오는 거품일 뿐입니까?”
만일 진실한 것이라고 한다면 먼저 그에게 하느님에 대해 배워 알자고 초대할 것이고, 거품일 뿐인 것이라면 들으나 안 들으나 마찬가지일 것이니 차라리 의사를 표현 하지 않는 것이 나을 것입니다. 들으면 성질만 돋울 것이기 때문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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