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사랑을 가르치기 위해 존재하지만 그 이면에 인간의 그릇된 내면이 일으키는 결과에 대해서도 잘 드러내고 있습니다. 인간의 어두움을 보고 그것으로 배워 알게 하려는 것이지요. 예수님의 주변에는 언제나 사랑만 가득했던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정반대로 증오가 넘쳐 흘렀지요. 그 험한 증오의 밭에서 예수님은 그 모든 것을 감내하신 것입니다.
신앙생활 초보들의 큰 착각은 ‘신앙생활 = 하늘나라의 생활’이라고 착각하는 것입니다. 신부님도 괜히 멋있고 수녀님은 성스러워보이고 사람들은 모두 착할 것만 같지요. 하지만 시간이 조금 흐르고 나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고 실망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건 실망할 일이 아니라 너무나도 당연한 일입니다. 만일 모두가 천사라면 교회의 존재 이유가 무색하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착한 너희들끼리 잘 살라고 예수님이 만드신 게 아니라 세상이 악하니 너희들을 뽑아 세워 악한 세상을 복음화할 일꾼으로 만들려고 세우신 것입니다. 그래서 교회 안에는 ‘완벽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게 아니라 ‘회개하는 죄인’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는 ‘아직 회개하지 않은 죄인, 회개할 마음이 없는 죄인, 여전히 악한 뜻을 품은 죄인’들도 모여있게 마련이지요.
예수님은 처음부터 이를 알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미리미리 경고를 단단히 해 두셨지요. 그럼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교회의 현실에 놀라고 실망하곤 합니다.
아기 예수님이 태어난 자리에 헤로데의 살육이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구원의 자리에 바리사이와 율법학자들의 시기와 증오가 있었지요. 성전의 거룩한 가르침에 대사제들의 분노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의 자리에는 정반대로 부활이 있었지요. 그것이 우리의 희망의 징표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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