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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지근한 신앙


진리와 선으로 나아가려는 사람은 서로를 알아봅니다. 그리고 서로에게 힘이 되어 주지요. 하지만 그 반대의 길에 서 있는 사람은 그런 선을 향해 나아가는 모습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습니다. 여기서 반대의 길이라고 한다고 해서 무턱대고 모두가 사탄주의에 빠져 있다거나 살인광에 정신병자라는 이야기는 아닙니다. 이웃이 하는 좋은 일에 시기하고 맘에 들어하지 않는 모든 움직임에 가담하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세상을 위해서 도움이 되는 일을 한다면 그것에 대해서 부정적인 감정을 지닐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하지만 이런 일들은 실제로 많이 일어나고 있습니다. 특히나 그가 하는 행동이 나의 개인적인 ‘유익’에 위배될 때에 그러합니다.

합당한 세금을 내는 것은 필요하고 옳은 일이지만 지금 내가 은밀하게 감추고 꿍쳐둔 돈을 빼앗아가려 한다면 그것은 성질이 나는 일이 됩니다. 영적인 차원에서도 비슷한 일이 일어납니다. 신앙생활을 하면서 기도하고 묵상하고 이웃을 돕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내가 나의 시간을 할애해서 나의 세속적인 일에 영향을 미칠 정도로 신앙이 나를 간섭한다면 그런 신앙은 거부합니다. 신앙은 자신의 자그마한 영역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 것이지요.

이런 미지근한 신앙으로 하느님을 사랑한다고 착각하고 자신은 훌륭한 가톨릭 신자라고 생각합니다. 예수님은 십자가를 지고 온 세상을 구원하셨는데 우리는 아주 작은 십자가에도 그만 손사래를 치고 말지요. 지극히 개인적이고 심지어는 이기적이기까지 한 구원관이 아닐 수 없습니다. 왜 이기적인가 하면 내가 무언가를 하지 않는 동안 그 할 일이 다른 사람에게 전가되기 때문이지요.

우리는 ’생각과 말과 행위로’ 지은 죄만이 아니라 ’자주 의무를 소홀히 하였음’을 고백합니다. 그렇습니다. 신앙인에게 신앙생활은 마땅히 해야 할 일인 것이지요. 그것은 여러 다른 일을 끝내고 마지막에 마음을 모을 수 있는 ‘옵션 상품’과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의 근본적인 자세를 차지하고 있는 것입니다.

세상 안에서는 온갖 퇴폐와 부정과 불의를 자행하다가 성당에 나올 때에만 깔끔하게 옷을 갈아입고 선한 척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마주하는 세상 안에서 우리의 신앙을 간직하고 빛을 내뿜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렇습니다. 이는 순진한 어느 선교 사제의 짧은 생각에 불과합니다.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도 모르고 하는 순진한 이야기이지요. 그러나 저도 만일 속적인 사제가 되고자 했다면 얼마든지 그렇게 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아주 가난한 곳의 사진을 찍어서 불쌍한 척을 하고 지원금을 억단위로 받아서 이중적인 생활을 할 수 있겠지요. 현지 사람을 만나는 것도 싫어하고 귀찮아하면서 돈 있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생기면 뒤도 돌아보지 않고 달려가고, 언제나 한국의 음식을 그리워하기만 하고 이곳의 모든 것이 불만스럽고 허구헌날 투덜거리기만 할 것입니다. 아니, 그 이전에 과연 이곳을 오기나 했을까 싶기도 합니다.

속적인 생각이 없어서 그 생각을 못하는 게 아니라 그 생각이 우리를 최종적으로 이끄는 길을 알기 때문에 의식적으로 하느님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진리와 선과 정의를 위해서 나아가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 안에 영원한 행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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