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혜가 옳다는 것은 그 지혜가 이룬 일로 드러났다. (마태 11,19)
지혜는 ‘삶의 증거’로 자신을 드러냅니다. 누구나 자신이 인내롭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참된 인내는 그가 힘든 상황을 겪을 때에 드러내는 태도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아주 작은 성가심에도 대뜸 화를 내면서 자신은 인내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거짓말’일 뿐입니다.
한 구역 모임에 참여해서 내가 입을 열려고만 하면 자신이 더 많은 말을 해대는 한 할아버지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하루는 작정을 하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할아버지, 만일 할아버지가 정말 그렇게 교리 지식이 해박하고 모든 것을 잘 알고 있다면 당연히 하느님을 위해서 일해야 한다는 것도 아실 거예요. 저는 할아버지 말대로 치노(중국사람의 스페인어 표현, 동양사람을 다 그렇게 부름)이고 스페인어를 잘 하지도 못해요. 하지만 할아버지는 볼리비아 사람이고 스페인어를 기본으로 쓰지요. 그리고 여전히 활력이 있고 말할 기력이 있어요. 헌데 저는 실제로 복음을 전하는 일에 열과 성을 다하고 있어요. 그렇다면 할아버지도 당신이 지니신 믿음을 드러내야 하겠지요. 저는 제 조국의 안락한 환경을 버리고 이곳에 왔어요. 그리고 이곳에 와서도 지금 할아버지가 저를 만나고 있는 것처럼 사람들을 위해서 헌신하고 있지요. 헌데 할아버지는 하느님에 대해서 그렇게 잘 알고 있다고 하는데 왜 저는 미사 때에 할아버지를 한 번도 보지 못했을까요? 할아버지, 신앙은 말로 하는 게 아니에요. 신앙은 삶으로 드러내는 거지요. 만일 할아버지에게 진정으로 믿음이 있다면 이미 주변 사람들이 모두 할아버지에 대해서 알고 있을 거예요. 아니,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모르지요. 저는 제가 할 일을 계속 하겠으니 할아버지도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면 됩니다.”
할아버지는 심심한 사람에 불과했습니다. 자신이 살아온 경험을 남에게 과시하려고 혈안이 된 사람에 불과했지요. 헌데 그 이야기를 아무도 들어주지 않으니 구역 모임에 나와서 온갖 썰을 풀고 계신 것이었습니다. 한편으로는 참 불쌍한 사람이기도 한 것이지요. 그러나 하느님에 대해서 배우고자 모인 사람들을 그 세속적인 정신으로 물들여 가는 것을 가만히 지켜볼 순 없었습니다.
지혜는 말로 완성되지 않습니다. 지혜는 삶으로 완성됩니다. 잊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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