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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들에게 다가서는 목자



오늘 사제 모임에서 자비의 해에 대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나누었습니다. 몇 월 며칠부터 이것이 시작되고 이런 저런 사항들이 준비될 거라는 이야기들이 있었지요. 그래서 저도 한마디 거들었습니다.

“이 말을 나누고 싶네요. 자비와 용서에 대한 여러가지 주변 배경들을 준비하고 신자들에게 그것을 전하는 것은 참으로 좋은 일인 것 같아요. 하지만 무엇보다도 신자들이 직접 마주하게 되는 것은 바로 우리 사제들의 얼굴이라는 것을 잊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실례로 제 본당의 한 자매가 말하기를 고해성사를 보기 위해서 한 신부님을 찾아갔더니 ‘고해성사 시간은 언제언제로 정해져 있으니 그 때에 와서 성사를 보라’고 하면서 고해를 거절했다는 거예요. 그 뒤로 겁이 나서 사제들에게 다가서지를 못한다고 하더군요. 과연 우리는 신자들 앞에서 어떤 얼굴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신자들이 정말 편안히 다가와서 성사를 볼 수 있게 도와주고 있을까요? 아니면 꺼림칙하고 부담스럽고 귀찮아하는 얼굴을 보여주고 있을까요? 교황님이 아무리 자비의 해에 대해서 선포하신다고 해도 우리 사제들이 회개하지 않으면 훗날 우리는 그 결과에 대해서 책임져야 할 거라고 생각해요.”

저는 요즘 매 미사 때마다 신자들에게 말을 합니다.

“여러분들, 고해성사는 여러분들의 권리입니다. 언제라도 오세요. 제가 본당에 있는 동안은 언제라도 고해를 보려는 분들에게는 성사를 주도록 하겠습니다. 그러니 걱정말고 오세요. 그리고 잊지 마세요. 훗날 여러분은 하느님 앞에서 그 어떤 변명거리도 찾지 못하게 될 것입니다. 사제가 성사를 주지 않으려 해서 성사를 보지 못했다는 말은 못 할 거란 말이지요. 적어도 제 본당 신자들은 그럴 겁니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에 세례자 요한은 사람들을 회개로 초대하며 길을 닦았습니다. 지금도 사제들의 할 일은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우리는 사람들을 회개로 초대하여야 합니다. 그래야 그 다음에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을 돌볼 수 있게 될테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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