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이런 저런 영적 가르침에는 둔감하다가 늘 ‘돈’과 관련된 가르침에는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왜냐하면 관심사가 거기에 쏠려 있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는 것을 즐기지만 다른 한 편으로는 영 불편한 셈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일단 겉으로 보기에는 가난해 보이고 뭔가 부자들에 대해서 반감을 잔뜩 지닌 것 같은 발언을 서슴지 않으십니다.
틀린 말은 아닙니다. 성경의 적지 않은 부분에는 부유함을 비난하는 것 같은 표현들이 적잖이 등장하곤 합니다. 하지만 그 본 뜻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제 위치에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새가 물 속을 날지 않고, 생선이 하늘을 헤엄치고 다니지 않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 저마다의 것들을 놓아 두셨지요. 자신이 가진 재능으로 자신의 환경에 가장 적합하게 살도록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정반대의 상황이 다가오면 그들은 도리어 불편해지게 됩니다. 물고기를 물 밖에 내어 놓으면 얼마 버티지 못하고 죽어버리고, 새를 물 속에 집어넣어도 마찬가지이지요. 자신이 가진 능력 속에서 별다른 아쉬움 없이 머무르면 그는 행복을 누릴 수 있는 것입니다.
세상은 모든 인간들이 끼니를 걱정하지 않고 아쉬움 없이 살아갈 만큼의 풍족함을 누릴 수 있도록 되어 있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사람들이 불확실해보이는 미래를 걱정해서 ‘쌓아놓고 재어 놓으려’ 한다는 데에 있지요. 사람들은 제 능력 안에서 최대치를 활용해 부를 이루고 그것을 오직 자신을 위해서만 사용하려고 합니다. 바로 이기심이 모든 것을 망쳐 버리는 것이지요. 사랑과 도움이 사라져버리게 된 것입니다.
이는 마치 우리의 몸이 서로를 위해서 아낌없이 봉사하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손은 손만을 위해서 일을 하지 않고 온 몸을 보살피기 위해서 일을 합니다. 심장도 자신을 위한 피만을 보내는 게 아니라 온 몸을 위해서 피를 보내지요. 온 몸의 지체는 저마다 서로를 위해서 봉사하게 되어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세상의 모든 것은 서로서로를 향한 도움과 보살핌으로 이루어지는데 한 지체가 자신이 수확한 것은 오직 자신만을 위해서 쓰여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문제가 시작되는 것입니다. 몸으로 비유하자면 ‘암세포’가 되어 버리는 것이지요.
하느님은 부유함을 비난하시는 게 아니라, 탐욕을 비난하시는 것입니다. 모으고 쌓을 줄만 알지 나눌 줄은 모르는 이들을 비난하시는 것이지요. 자신이 그 부유함을 얻고 유지하도록 허락하신 분의 존재를 잊고 오직 자기 자신에게서 그 모든 능력이 나온 줄 착각하는 이들을 비난하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탐욕이라는 것은 부자들만 가지는 것이 아닙니다. 가난하지만 탐욕스러운 사람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일용직 노동을 해서 몇 푼 번 돈을 오직 자신의 쾌락을 위해서 쓰는 정신나간 남편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집의 가족들에게는 겨우 끼니나 때울 만큼의 돈을 주고 나머지는 자기가 혼자 관리하지요. 이는 이기심이고 탐욕입니다. 가난한 자들도 얼마든지 탐욕스럽게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지금 당장 돈이 없어서 그 탐욕이 미치는 영향이 미미할 뿐이지요.
외적 가난함이 그 자체로 상급이 될 수는 없습니다. 그 외적 가난함을 내적으로 어떻게 받아들이는지가 중요한 일입니다. 반대로 외적 부유함이 그 자체로 죄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 외적 부유함을 어떤 내면 상태로 받아들이고 다루는가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지요.
부유함과 탐욕에 대한 이런 본질을 알게 되면 비로소 스스로를 올바로 살펴볼 수 있게 됩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이 바로 이 주제에서 자유로울 수는 없다는 것을 스스로 느끼고 있지요. 그래서 모든 계명을 다 지킨 그 부자 청년도 예수님의 마지막 요구 앞에서는 슬픔을 느끼고 떠나간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알지 못합니다. 자신이 부유함과 탐욕에서 온전히 자유로워졌을 때에 그 기쁨은 실로 대단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