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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자 이야기를 하려다 자기 주제를 반성하는 자세로 돌아가는 엉뚱한 글…

수도자 이야기를 하려다 자기 주제를 반성하는 자세로 돌아가는 엉뚱한 글…

간혹 신앙생활에 조금 다가서다 보면 ‘수도자’가 되겠다는 원의를 품는 이들이 있게 마련입니다. 하느님에게 온전히 봉헌된 생활을 하고 싶다는 가장 기초적인 원의가 생겨나는 셈이지요. 헌데 이 소박한 원의는 머지않아 이런 저런 시련을 마주하게 됩니다.

무엇보다도 수도원을 찾고 들어가는 것이 큰일입니다. 어떤 성소를 택해야 하고 어느 루트로 신청을 해야 하는지 등등이 현실적인 고민거리로 다가오지요. 물론 이 단계를 쉽게 건너뛰는 경우도 있습니다. 이미 본당에 상주하고 있는 수녀님들에게 엄청난 주목과 사랑을 받으면서 교리교사생활이나 청년회 생활을 하다가 그냥 그 수녀회로 들어가는 경우이지요. 크게 다른 생각을 하지 않고 그 수녀회가 전부인 줄 알고  그냥 하느님과 가까이 머무르고 싶어서 들어가는 것입니다.

일단 수도회에 들어가게 되면 두 번째 현실이 다가오게 됩니다. 세속의 때를 벗는 과정이 시작이 되는데 이 과정이 영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는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런 저런 푸념을 하게 되고, 또…

이 글을 쓰다가 이건 내 영역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저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을 간단하게 하면, 수도생활이라는 게 ‘달빛 환상’이 아니라 엄연한 현실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었습니다.

수도자는 특별한 자기 봉헌으로 신앙의 투사가 되는 것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었지요. 수도원에 들어가서 일상의 밋밋함에 궁시렁거리고 투덜거리고 장상 욕이나 하라고 수도자가 되는 게 아니라 다른 신앙인들의 모범이 되고 더욱 시련과 어려움에 다가서기 위해서 수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헌데 오늘날의 수도원은 오히려 더 많은 편의와 안락을 제공하면서 도리어 수도생활의 본질을 잃어가고 있지는 않은지 걱정을 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이 주제 넘는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다시 본연의 모습으로 돌아가서 제 할 일이나 열심히 하도록 하겠습니다. 선교 사제로서 늘 기쁘고 활기차게 현지인들에게 신앙을 전하도록 하겠습니다. 모든 수도자분들에게 하느님의 성령이 함께 하셔서 각자의 카리스마를 온전히 이룰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평화를 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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