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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


사람이 현실을 모르면 엉뚱한 소리를 하게 됩니다. 지역 사람들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즐기는지 전혀 감이 없이 그저 자기 혼자 좋아하는 것을 팔기 시작하는 장사꾼은 얼마 가지 않아서 문을 닫게 됩니다. 장사를 시작하려면 지역 현황을 올바로 조사해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근본적인 사명은 모두 똑같지만 각 지역별로 서로 다른 형태를 드러내어야 합니다. 어느 곳이 레지오가 잘 된다고 그것을 일반화 시킬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가장 기본적인 성체성사는 이루어져야 하지만 나머지 활동은 각각의 지역의 특성에 맞게끔 짜여지고 이루어져 나가야 하는 것입니다.

본당 사목구 주임은 그 지역에 파고들어 그 지역의 특성을 올바로 잘 이해하고 가장 적합한 사목 방식을 찾아야 합니다. 그것이 리더 양성일 수도 있고, 사회복지일 수도 있고, 기초교육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런 여러 경우들에 있어서 때로 우리는 ‘원래의 길’을 잃어버리기도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NGO단체가 아니며 학교도 아니며 정치 조직도 아닙니다. 교회는 신앙의 공동체이고 회개하는 죄인들이며 하느님의 백성입니다. 우리가 이 핵심, 즉 하느님을 향한 방향을 잃어버리기 시작한다면 세상 안에서 아무리 두각을 드러내는 외적 형태를 지닌다고 하더라도 아무 소용이 없게 마련입니다.

헌데 이런 일들이 오늘날 적지 않은 곳에서 목격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다시 핵심을 잃어버리고 전통과 관습을 추구하기 시작하고, 또 인간적인 일에 열중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가장 중요한 하느님을 향한 방향성을 상실한 채로 엉뚱한 일에 연연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리고 그 가운데 돈에 대한 탐욕, 명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탐욕이 끼어들면서 여러가지 복잡 다단한 문제들이 동시다발적으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러한 가운데 신자들은 길을 잃고 심지어는 사제들조차도 길을 잃기 시작한 셈이지요.

목자를 치면 양들이 흩어지게 됩니다. 어둠의 영들은 최우선적으로 사제들을 공략하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자연스레 양들이 흩어지게 될 테니까요.

일치를 공격하는 수많은 움직임들이 일어나고 사람들은 서로 의심하고 불신하며 서로를 향해 시기와 증오를 불태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는 이미 무너진 것이나 다름 없는 셈이지요.

이런 이야기를 들으면 가슴이 답답해지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의외로 해결방법은 간단합니다.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우리의 교회의 핵심이자 근본인 예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그분의 가르침을 듣고 그분이 사는 모습대로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것이지요. 어둠의 행실을 버리고 빛의 행실을 따라가면 됩니다. 그러면 내부로부터 서서히 회복이 시작되게 됩니다.

희망은 늘 존재해 왔습니다. 사람들이 찾지 않았을 뿐이지요. 정신만 똑바로 차릴 수 있다면 우리는 언제라도 길을 회복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정신은 흐릿해져 있습니다.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수많은 것들은 우리의 정신을 흐릿하게 만들기에 충분합니다. 우리는 깨어 있을 필요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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