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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지혜


우리는 일상적인 행위 안에 참으로 많은 생각의 흐름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무언가를 사 먹을 때에는 단순히 ‘배고픔’ 때문에 그 일을 하지는 않습니다. 먹을 것을 고를 때에 일어나는 수많은 생각들, 이미 가지고 있는 배경 지식을 바탕으로 더 나은 음식을 고르고, 또 다른 한편으로 이 음식에 들어가 있을지도 모르는 나쁜 요소들에 대한 여러 뉴스들을 상기하기도 하고, 또 겉포장지의 화려함을 고르기도 하며, 가격을 걱정하기도 합니다. 이처럼 하나의 단순한 행동 안에는 참으로 수많은 생각들이 오가는 것이지요.

현대는 이 복잡함을 더욱 부추깁니다. 우리가 일상을 영위하는 데에 필요한 단순한 정보를 거뜬히 넘어서서 정보의 홍수를 일으키고 모든 활동에 있어서 우리의 잠재적인 생각을 더욱 복잡하게 만들어 버리곤 하지요. 그래서 생각에 골몰하다가 결국 실제로 해야 하는 일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거나 또는 엉망으로 하기도 합니다.

사랑하라 하는데 그 사랑 안에 내포된 수많은 엉뚱한 생각들을 검토하느라 아무런 구체적인 행동을 하지 못하게 되는 것이지요.

지혜와 분별이라는 것은 필요하지만 지혜와 분별을 ‘의심’과 ‘억측’으로 뒤바꿔 놓아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의심하기 시작하면 끝이 없고, 억측하기 시작하면 아예 소설을 쓰게 됩니다.

하느님의 사람들은 생각이 단순합니다. 그들에게는 천상의 지혜가 있고 그 지혜는 그들의 삶으로 표현되지요.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하지 않습니다. 헌데 세상 사람들은 복잡합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을 해야 할 것으로 둔갑시켜서 해버리고, 해야 할 것을 교묘하게 피해서 하지 않아도 되는 것으로 만들어 버리니까요.

우리가 하느님과 머무르지 않으면 우리에게는 지혜가 없고, 영리함만 남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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