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마태 1,21)
예수님이 세상에 온 목적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기 위함입니다. 그래서 스스로 죄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혹은 별로 심각하게 본인 스스로를 돌아보지 않는 사람은 예수님이 필요 없다고 생각하거나 예수님의 존재에 대해서 별다른 감흥이 없습니다.
당연한 일이지요. 필요하지 않은 것을 찾는 사람은 없으니까요. 여러분들이 한국에서 이곳의 에보 모랄레스 대통령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그렇다면 문제는 과연 예수님은 필요할 때만 찾으면 되는 존재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우리가 예수님의 신원에 대해서, 실제적인 존재에 대해서 얼마나 알고 있고 또 믿고 있는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는 아는 만큼 믿고, 또 믿는 만큼 알게 됩니다. 이 둘은 서로 떼어놓을 수 없는 관계에 있지요. 믿음은 우리를 색다른 이해의 지평으로 초대해주고 우리가 아는 것들은 더욱 굳건한 믿음의 장을 열어줄 수 있게 마련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지식은 사실 상식적인 선에서 많은 이들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마다 다른 정도의 인식을 가지고 있게 마련입니다.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이스라엘 팔레스티나 지역에서 존재했던 한 인물로 인식할 수도 있고, 또다른 누구에게는 지금 이 순간 세계 곳곳의 성찬례 안에서 실존하는 분으로 인식할 수도 있지요.
그런 각자의 인식은 저마다의 믿음에서 기인하기도 하고, 또 반대로 저마다 알게 된 사실로 인해서 믿음이 커지기도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실존에 대한 인식에 이르기까지는 우리의 능력이 너무나 초라하고 부족하게 마련이고, 이것이 단순한 약점이라기보다는 우리의 그릇된 선택에서 기인하는 것인 경우가 많습니다.
즉, 우리가 그릇되이 선택한 것들, 참되고 진실되고 보다 가치로운 것을 버리고 별 의미없는 것들을 선택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의 믿음은 그 자리에 머물러 버리게 되는 것이지요. 그 그릇된 선택을 ‘죄’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하느님 아닌 것들을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것은 ‘돈’이기도 하고, ‘명예’이기도 하고, ‘권력’이기도 합니다.
예수님이 오신 이유는 바로 그런 상태에 빠져 있는 우리들에게 새로운 활력을 불어넣어 주고 다시 초대하여 영원을 얻도록 도와주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당신의 제자들을 남겨서 당신의 사명을 계속하도록 하셨지요. 그것이 바로 ‘교회’인 것입니다.
자, 이쯤 되면 알 만 합니다. 교회는 단순히 자기들끼리 계모임을 하는 것이 아니라 세상으로 나아가서 사람들에게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는 것이지요. 교회는 선포하고 가르치고 불러들이고 초대해야 하는 것입니다. 교회는 이기적이고 개인적인 집단이 아니라 근본적으로 세상을 향해 펼쳐져 있는 공동체인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어둠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세상으로 인해서 나의 옷을 더럽히지 않으려고 움츠러드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대로 그런 세상을 깨끗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이들이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지요. 많은 사람들의 신앙은 소극적이고 개인주의적입니다. 혼자 열심해서 구원 받으면 된다고 생각하고 자신들을 성가시게 하는 이들은 그저 멀찍이 떨어져 있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지요.
아닙니다. 정반대입니다. 우리는 세상을 향해서 나아가야 하고 그들과 만나 그들을 초대하고 이끌어야 합니다. 그러는 동안 우리의 옷은 더러워질 수도 있을 것입니다. 유혹이 있을 것이고 악에 빠지는 경우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님을 믿기에 그 일을 수행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맡은 사명을 충실할 때에 우리의 주님께서는 우리에게 필요한 도움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성당의 트리를 장식하고 반짝이는 전구로 꾸미는 것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입니다. 하지만 보다 아름다운 일이 있으니 우리가 세상으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는 일입니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구원의 나무를 세우는 일이며, 수많은 영혼들의 찬란한 빛으로 그 나무를 장식하는 일이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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