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 (루카 1,51)
자신이 주변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이들이 수두룩합니다. 이런 차별적인 생각은 여러가지 요인에서 기인합니다.
남녀 간의 차이에서, 인종 간의 차이에서, 학식의 차이에서, 재산의 차이에서, 문화 수준의 차이에서, 내적 발전의 차이에서, 신심의 차이에서… 온갖 것들이 서로를 갈라놓는 요인이 되곤 합니다.
선교사로 전혀 다른 문화와 전혀 다른 생활환경에서 살아가면서 이런 모습들을 더 명확하게 관찰할 수 있게 됩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자신이 더 우위에 놓여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어하고 실제로 우위에 서고 싶어합니다. 그러면서 늘 하는 행동은 상대를 깎아 내리는 것이고 상대의 처지를 낮춰 바라보는 것입니다.
누군가가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동일한 자녀이고 같은 아버지를 모신 같은 형제들이라는 것을 이해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겹겹이 둘러쌓인 장벽을 무너뜨려야 합니다. 하지만 적지 않은 이들은 그 부분에서 실패를 하고 자신이 설정한 그 장벽 안에 머물러 살아갑니다. 자기 스스로는 그 장벽이 자신을 지켜주는 도성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제로 그 장벽은 자신을 가두고 있는 감옥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부자는 가능하면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있는 곳에 가지 않으려 합니다. 그 내면에 설정된 자신의 부에 대한 집착이 그것을 가로막는 것이지요. 그들과 나는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언뜻 그들은 가난한 이에게 다가서는 척을 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들 내면에 단단히 박혀 있는 이 차별적인 생각은 절대로 그들을 자유롭게 하지 못하고 언제나 그 만남 안에서 거부감을 느끼게 합니다.
결국 그들이 최종적으로, 즉 생을 마감하고 하느님 앞에 이르렀을 때에 최종적으로 느끼게 될 감정은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신들이 천시하던 이들이 하느님 품에 안겨 있고 자신들은 그 근처에 다가서지도 못하는 꼴을 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그들은 ‘시기’에 사로잡히게 되고,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에 ‘증오’와 ‘원한’을 거룩한 분 앞에서 품기도 할 것입니다. 즉, 성탄절에 어떤 선물을 받을 것이라고 분명히 기대하고 있었는데 그 선물은 커녕 자기 동생이 자신이 원하던 선물을 받고 자신은 이제 다 컸다고 아무것도 받지 못한 맏이꼴이 되는 것이지요. 그것이 교만한 자들의 운명입니다.
그러나 그들은 깨닫지 못합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문화적으로 우월하고 환경적으로 우월하며 인종적으로 우수하고 성별적으로 뛰어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기보다 열등한 이들의 영광을 인정하기가 너무나도 힘들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담을 그릇으로 갈릴레아 나자렛의 시골 처녀를 선택하신 것입니다. 만일 하느님이 세상 사람들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면 왕궁의 공주를 선택했을 테지요. 그러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주님은 구유에서 어린 아기의 모습으로 태어나셨습니다. 겸손의 왕이시지요.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 1,51-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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