축복이란 무엇일까요? 사람들은 축복 받기를 원합니다. 한국에서는 ‘복’이라는 단어로도 충분히 설명이 되지요. 교회 안에서는 ‘은총’이라고도 합니다. 이러한 말들은 무엇을 나타내고 과연 우리에게 어떻게 전해지는 것일까요?
과거 사람들은 우리에게 다가오는 좋은 일들, 혹은 나쁜 일들은 우리 행위의 결과라고 믿었고 실제로 그러했습니다. 우리가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일을 행하면 결국 좋은 일이 돌아오고, 나쁜 마음으로 나쁜 일을 행하면 결국 나쁜 일이 돌아오는 법이었지요. 하지만 꼭 그런 것만도 아니었습니다. 나쁜 마음으로 나쁜 일을 행했는데 결과는 떵떵거리며 잘 사는 사람들도 적지 않고, 반대로 좋은 마음으로 좋은 일을 행했는데 그 결과로 더 비참하게 사는 사람들의 모습도 심심찮게 발견할 수 있게 되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하늘의 축복’을 청하는 것입니다. 자신에게 일어나는 곤란한 일을 막고 자신에게 좋은 일이 가득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보이지 않는 힘에 기대는 것이지요. 그 거룩한 위로부터의 힘을 한국에서는 ‘하늘’이라고 부르고 그분의 뜻을 ‘천지신명’이라고 하며 교회 안에서는 ‘하느님(하나님)’이라고 부르고 그분의 뜻을 하느님의 뜻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사실 하느님이 제대로 된 하느님이기 위해서는 ‘전능’을 지니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일부분의 힘을 지니고 있으면 ‘전능하신 하느님’이 될 수가 없는 셈이지요. 그래서 우리 하느님은 ‘전지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즉 모든 것을 알고 모든 것을 행할 능력이 있으신 분이시지요. 그 분이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이루어지게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분은 모든 것을 알고 있어서 어떤 일이 왜 벌어지고 있는지 분명히 알고 계시지요. 그래서 그분의 뜻을 벗어나는 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모든 일은 그분의 뜻에 따라서 일어나게 됩니다.
그럼 이 말은 무슨 뜻일까요? 세상의 모든 악도 그분이 조장하시는 것일까요? 천만의 말씀입니다. 하느님은 모든 것을 선하고 좋게 만드셨습니다. 그래서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지요. 인간이라는 존재는 하느님을 닮은 존재입니다. 하느님의 모상을 지니고 있지요. 그 말은 인간 안에 하느님의 것을 나눌 수 있는 능력이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그 능력은 바로 ‘사랑의 능력’이고 그 사랑의 능력의 핵심에는 ‘자유의지’가 존재하는 것입니다. 이것 자체가 하느님의 은총이요, 축복인 셈입니다. 우리 인간은 하느님의 선하심과 축복으로 주어진 우리 안의 자유의지로 인해서 사랑을 할 수 있고 행복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자유의지가 없는 사랑은 존재하지 않으니까요. 컴퓨터에 프로그램을 넣어서 ‘사랑하게’ 한다고 해서 그것이 사랑이 되지는 않는 것입니다. 참된 사랑은 상대가 온전히 자유로울 때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문제는 인간이 그 자유를 자기 멋대로 쓰기 시작하면서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그래서 더욱 더 행복해지라고 주신 자유의지를 정반대의 의미로 쓰기 시작한 것이지요. 즉 하느님에게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기 자신을 또다른 신으로 만들기 위해서 그 자유의지를 사용하기 시작한 것입니다. 그래서 그래서 우리 스스로 하느님의 소중한 은총, 축복을 저버렸고 그 결과로 ‘죽음’을 얻게 되었습니다. 인간으로서 ‘한계’를 깨닫게 하기 위해서 죽음이 죄에서 싹튼 셈입니다. 인간은 자유를 지니고 있지만 죽음이라는 제약 안에서의 자유를 지니고 있고 그 죽음은 언제 어떤 식으로 인간에게 다가오게 될지 그 누구도 짐작하지 못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죄를 짓는 이는 자연스레 죽음의 위협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야기는 여기서 끝나지 않습니다. 하느님은 그런 불쌍한 인간을 다시 당신으로 초대하기 위한 움직임을 시작하셨습니다. 바로 ‘구원’을 시작하신 것이지요. 이는 전적으로 하느님의 선하심이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은총, 축복, 복이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구원은 다양한 방식으로 드러났습니다. 하느님은 수많은 예언자들을 통해서 당신의 백성을 부르셨지요. 하지만 죄악에 사로잡힌 사람들은 그들의 애정 가득한 경고의 말을 귀담아 듣기보다 제 갈 길을 가기 바빴습니다. 하느님의 은총의 초대에 감사하기는 커녕 그들을 내치고 박해하고 죽이기까지 했지요.
때의 정점에 이르러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보내십니다. 당신 스스로 이 땅에 내려오신 것이지요. 그러나 결과는 우리 모두가 아는 바대로 입니다. 그분은 수난 당하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리고 모든 것은 끝난 것처럼 보였지요.
그러나 하느님은 바로 거기에서부터 새로운 길을 열어 주셨습니다. 바로 당신의 외아들을 부활시키신 것이지요. 그리고 그로 인해서 ‘죽음’을 없애 버리신 것입니다. 부활하는 존재, 영원히 사는 존재에게 죽음이라는 것은 의미없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당신의 외아들을 길로 삼아 따르는 모든 이들에게도 영원한 생명을 약속하셨습니다. 그리하여 이제부터는 하느님의 자녀들에게는 ‘죽음’이 그 사악한 힘을 발휘하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늘 받게 되는 은총, 축복인 것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이를 이해하지 못하고 전혀 다른 식의 은총과 축복을 원합니다. 예를 들면 자신의 사업이 잘 되기를 바라거나, 대학에 붙기를 바라거나 하는 식이지요. 아니면 자신에게 일어나는 고통이 일순간에 없어지거나, 병고가 순식간에 낫는 식의 은총을 갈구합니다. 여전히 사람들은 ‘은총’에 대한 올바른 이해가 없이 막연하게 자신의 이기적 갈망을 채우려고 드는 것이고, 이 세상의 목숨을 위해서 나은 것을 선택하는 셈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은 십자가가 은총이라는 말을 이해하지 못합니다. 선하신 분을 위해서 스스로 고통받는 것의 의미를 깨닫지 못합니다. 오직 고통에서 벗어나려고 하고 거기에서 해방되려고 하지만 그럴수록 더 큰 고통에 젖어들게 됩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하기 위해서 그에게 허락되는 시련 속에서 우리는 하느님의 축복을 감지해야 합니다. 그에게 영원을 선물하기 위해서 현세에서 정화를 위해 주어지는 고통을 이해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은 닫혀 있고, 자신에게 직접적으로 다가오는 고통에 민감하며 오직 그것을 피하고 싶은 생각만 지니고 있을 뿐, 그 안에 숨어 있는 고통의 진정한 의미를 성찰할 마음의 여유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느님의 축복은 사람의 영혼을 당신에게로 이끄는 모든 움직임을 말합니다. 하느님의 은총은 우리의 생명 자체이며, 우리가 마주하는 모든 일상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숨쉬는 공기의 중요성을 망각한 채, 특별한 향수 냄새만 찾아다니는 상인과도 같은 모습입니다. 은총은 모든 것입니다. 세상에 은총이 아닌 것이 없습니다. 다만, 우리의 죄악이 그 은총을 가로막을 뿐이고 파괴할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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