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는 먼저 문제를 인식하는 것이 우선되어야 할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습니까? 설령 나 자신에게는 특별히 문제 없는 하루라고 할 수 있겠지만 그걸로 끝인가요? 나는 나 혼자 살아가는 사람 맞습니까? 아니면 타인의 오류와 그릇됨은 결국 나의 책임이기도 한 것인가요? 그래서 우리는 우리의 문제를 함께 나누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문제를 바라봄에 있어서 우리는 ‘올바른 시선’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 ‘올바름’의 기준은 어디에서 비롯할 것입니까? 저마다 다른 근거지에서 이 ‘올바름’을 시작한다면 결국 자신의 근본 거처에 따라서 서로 부딪히게 될 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누군가는 수학적인 명제를 이야기하고 다른 누군가는 자연 과학적인 명제를 이야기한다면 언젠가는 두 부분에서 서로 일치하지 않는 의견이 존재하게 될 것이고 결국 둘은 하나가 되지 못할 것입니다. 우리는 문제를 올바로 분별하기 위해서 같은 근거지에 서 있어야 합니다.
물론 이는 쉽지 않은 일입니다.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신뢰의 근거를 지니고 살아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적어도 우리 같은 신앙인들은 비록 다른 모양새를 지녔지만 분명한 하나의 동일한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은 우리 모두에게 존재의 근거를 제시하시는 분이십니다.
우리 신앙인들은 바로 이 하느님을 같은 분별의 근거로 삼고 모든 일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합니다. 여기에서 두 번째 질문이 등장하게 됩니다. ‘하느님의 뜻’은 어디에 드러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느님의 뜻을 두고 사람들의 마음이 서로 많이 갈라지기도 했습니다. 하느님이 이것을 원하신다 저것을 원하신다 하면서 갈라진 것이지요. 하지만 하느님이 이런 진리를 말씀 하시다가 또 다른 진리를 말씀 하시다가 하실 분이 아닙니다. 하느님의 진리는 오직 하나입니다. 그리고 그 진리는 오직 그 진리를 따르려는 맑은 영을 통해서 드러납니다.
성경과 교회가 바로 그 대표적인 두 주자입니다. 성경을 적은 저자들은 모두 맑은 영으로 하느님의 뜻을 드러내려고 했고 따라서 하느님은 성령을 보내어 그들이 당신의 뜻을 적어내려가게끔 하셨습니다. 물론 그들 만의 문화와 방식으로 그렇게 하도록 하셨지요. 또한 교회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보전하기 위해서 노력해 왔습니다. 비록 교회의 구성원들의 수없이 많은 오류들로 교회의 역사 안에서 이런 저런 오점들을 남기기는 했지만 교회가 전체 구성원이 맑은 양심으로 결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오류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이렇게 우리는 성경과 성전(거룩한 전승)이라는 두 가지의 하느님의 뜻을 담은 근거를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오늘날에도 인간의 오류는 작용하고 있고 아무리 거룩한 뜻을 지니고 있는 것이라 할지라도 그것을 전하는 이들의 오류는 피할 수 없는 것이지요.
따라서 우리는 맑은 영을 회복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회개하고 또 하느님의 뜻이 내 안에 살아 숨쉬게 하기 위해서 끊임없이 사랑을 실천해야 합니다. 그렇게 할 때에 우리 안에서 여전히 성령은 작용하게 되고 우리는 맑은 눈으로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올바로 분별하게 되어 앞으로 나아갈 길을 찾게 되는 것이지요.
사람들은 칭송 듣는 것은 좋아하지만 자신들의 오류를 지적받고 수정해 나가는 것은 힘들어합니다. 그래서 누군가는 그런 그들에게 합당한 이야기를 전하는 사명을 지니게 되고 바로 그 사명으로 인해서 그들은 고통 당하게 됩니다. 사실 모든 그리스도인이 같은 운명을 지니고 있습니다.
하지만 소위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 그리스도인들이 이런 같은 운명을 나누고 있을까요? 적지 않은 이들이 최대한 ‘문제’에서 멀어지기 위해서 지극히 개인주의적인 신앙생활에 몰두하고, 또 그렇게 하다가 결국 신앙을 내려두고 ‘쉬는 교우’로 들어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스스로는 여전히 ‘신앙인’이라고 생각하고 있지요.
신앙인들에게는 분명한 표지가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때 이마에 자동으로 새겨지는 표지가 아니라 바로 ‘의로움 때문에 박해를 받는’ 표지입니다. 즉, 내가 아무런 잘못을 한 일이 없고 나아가 다른 이를 사랑하고 도와주려고 하는데 받게 되는 고통을 말합니다. 그것이 바로 우리의 십자가이고 우리를 진정한 그리스도인으로 초대하는 길이 됩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고 하신 예수님의 그 말씀의 뜻은 바로 우리가 우리 자신, 즉 세상 안에 물들어 있는 나의 지상적 존재를 점점 비워내고 내가 저지르지 않은 잘못을 대신 지는 것에 대한 무게감을 상징하는 ‘십자가’를 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는 문제가 적을 수는 있어도 지금의 사회 전체를 바라보는 눈을 지닌다면, 시대의 징표를 읽는 눈을 지닌다면 우리에게는 분명히 문제가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금의 이 시대의 문제를 나누어 질 수 있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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