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라는 것은 공정함을 실천하는 것으로 사실 의로움 앞에서 힘을 잃는 것입니다. 정의는 불법을 행하는 이들을 위해서 마련되는 것이지 올바른 선과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정의는 기껏해야 잘 하는 이들에게 상을 줄 수 있을 뿐인데 이미 선을 실천하는 그들은 자신들의 거룩한 삶 자체가 행복이기에 특별한 보상을 바라지도 않을 것이기 때문이지요. 그래서 정의는 주로 불법을 저지르는 악인들에게 날을 세웁니다.
하느님은 정의로운 분이십니다. 어둠을 그냥 지켜보고 계시지 않습니다. 그에 상응하는 결과물을 늘 준비하고 계시지요. 하지만 그 정의는 ‘자비’ 앞에서 주춤하게 됩니다. 자비라는 것은 하느님의 무한한 사랑으로서 정의에 앞서는 것이고 보다 지혜롭고 포괄적인 의미를 지니기 때문입니다. 정의가 이미 지나간 자리에는 자비가 활동할 여지가 없습니다. 그래서 하느님은 먼저 자비에게 정의의 자리를 양보하시는 것입니다.
자비라는 것 역시도 죄인들에게 집중되어 있습니다. 의인이 자비를 필요로 할 이유는 크게 없기 때문입니다. 자비는 죄인들을 위한 것이지요. 그들에게 또다시 기회를 주기 위한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하느님은 ‘자비로운 분’이십니다. 그 자비는 어마어마한 것으로서 가장 극악무도한 죄인도 그 즉시 심판을 받지 않고 자비를 입게 됩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하느님의 자비의 상징입니다. 바로 구리뱀이시지요. 누구든지 쳐다보면 살라고 오신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자비롭고 사랑이 가득하신 분이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비를 자비 그대로 받아들일 줄 알아야 합니다. 우리는 그분을 쳐다볼 줄 알아야 하고 그분에게 다가서서 구원을 얻을 줄 알아야 합니다.
다른 한 편, 그분의 자비의 시대가 끝나고 나면 보다 채비를 갖춘 정의가 다가온다는 것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자비가 강하면 강할수록 정의는 더욱 엄해지게 됩니다. 기회가 더 많이 주어지면 주어질수록 그에 상응하는 책임은 더욱 늘어나는 것이지요.
불뱀은 언제라도 다가와서 우리를 물어 죽일 수 있습니다. 아직 우리에게 시간이 있는 동안 우리는 열심히 구리뱀에게 다가서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바라보아야 하고 하느님의 자비를 바라보아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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