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의 고통은 여러 면모로 다가오지만 가장 즉각적이고 분명한 것은 신체의 고통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신체의 고통을 두려워하고 피하려고 하지요. 그러나 우리가 단순히 겪는 신체의 고통 외에도 다른 고통들이 얼마든지 있고 또 때로는 신체의 고통을 넘어서는 통증을 느끼게까지 하기도 합니다. 젊은 연인들은 실연의 고통을 겪기도 하고 어른들은 돈욕심에 사로잡혀 모종의 고통을 당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드물지만 영적인 고통을 당하기도 합니다.
사제가 존재하는 이유는 인간의 고통의 문제에 무언가를 전해주기 위해서입니다. 만일 육체의 고통을 극심하게 겪는 이가 정말 아무도 나서서 도와주는 이가 없다고 한다면 실제로 그를 육체적으로 도와주기도 해야 하고, 또 심리적으로 고통받는 이가 있다면 그 역시 도와주어야 하겠지요. 하지만 이런 영역들은 이미 세상에서도 그 대응방안이 잘 마련되어 있습니다. 사회복지를 하는 이유가 바로 첫번째 사안에 대응하기 위함이고 정신과 진료가 존재하는 이유가 바로 두번째 사안에 대응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래서 사제들은 ‘세번째’ 영역에 주목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 영적인 고통이지요. 우리의 신체가 적절한 훈련을 받을 때에 높은 산을 올라가도 쉬이 피로해지지 않는 것처럼 우리의 영혼도 적절한 훈련을 통해서 미리 힘을 길러둘 필요가 있습니다. 사제들은 그런 고통을 예방하고 또 실제적으로 고통이 다가올 때에 양들을 위로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영의 고통은 ‘사랑이 부족해서’ 일어나는 고통이거나 ‘사랑에 상처를 받아서’ 일어나는 고통입니다. 우리는 사람들 사이에 살면서 사랑을 갈구하지요. 하지만 쉽게 사랑을 내어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너도나도 사랑이 부족하다고만 할 뿐이지요. 그래서 사람들에게는 늘 사랑이 부족합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런 가운데 살아가는 것이지요.
사제가 사람들에게 합당한 사랑을 내어주려면 먼저 자신이 사랑을 담뿍 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그 사랑은 사람들에게서 받는 사랑이 아니라 하느님에게서 얻는 것이어야 합니다. 사제가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갈구하다 보면 때로는 엇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인간적인 위로를 찾는 사제는 결국 그 인간적인 위로 속에 숨어 있는 여러가지 오류들에 같이 빠져들게 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사제는 ‘기도하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사제는 하느님과 친근해야 하고 하느님에게 시간을 내어주는 ‘고독한 사람’이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 따로 산으로 올라가셔서 기도하신 이유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셨고 그들을 도와주고자 애쓰셨지만 그들에게서 돌아오는 사랑에 크게 기대하지는 않았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은 진정한 사랑의 근원으로 늘 돌아가셨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을 배워야 합니다. 그래야 그분에게서 합당한 사랑을 받고 그 사랑으로 다른 이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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