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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상 완화가 아닌 치료



많은 현대인들이 종교를 찾는 목적은 진정한 치유가 아니라 ‘편안함’을 위해서입니다. 종교를 통해서 자신의 힘든 삶에 ‘안락’을 추구하는 것이지요. 그래서 그런 용도로 존재하는 수많은 종교들이 있고 사람들은 그것에 쉽게 다가섭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교는 어떨까요? 그리스도교도 ‘편안함’을 제공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얻는 구체적인 방법에서 조금 다른 면모를 드러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교의 핵심 가르침은 ‘십자가’를 통한 ‘부활’이기 때문이지요.

아픔을 잊게 하는 데에는 여러가지 방법이 있습니다. 가장 보편적인 것으로 ‘완화’시키는 방법들이 있지요. 약물을 이용해서 신경계를 둔하게 만들어서 급한 통증을 멈추게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방법으로는 그 상처 자체를 치유하고 아픈 부위 자체를 치료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하지만 이 두 번째 방법에는 그에 상응하는 치료행위가 필요합니다.

흔히들 감기약은 치료약이 아니라고 합니다. 맞는 말입니다. 감기를 낮게 하는 구체적인 방법은 없습니다. 다만 감기 증상들을 완화시켜 고통을 경감시키는 방법이 있을 뿐이지요. 감기의 구체적인 치료는 ‘휴식’과 ‘쉼’이기 때문입니다. 즉, 몸의 면역체계를 정상화 시키는 것이 근본적인 치료가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수많은 죄악과 오류들은 그 증상 완화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근본적인 치료가 필요합니다. 분명히 잘못되어 있는 것을 그저 ‘괜찮다’, ‘그 정도는 누구나 겪는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으로는 아무런 변화도 일어나지 않습니다. 그저 일시적인 감정적 위안을 가져다 줄 뿐이지요.

그리스도교는 예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서 한 인간의 진정한 본질을 드러내게 하고 그로 인해서 근본적인 문제점을 직면하게 만들어 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런 그리스도교에 쉽게 다가서지 못하고 그 주변에 서성이게 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수십년간 해왔다지만 신부님과 저녁에 술이나 먹을 줄 알았지 실제적인 신앙적인 고민을 직면해 보지 않은 사람이 수두룩합니다. 특정 신심행위의 방법론에 대해서는 상세하게 알지만 정작 자기 자신의 ‘증오’를 어떻게 다스리는지 모르는 이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우리는 이런 거짓된 증상완화책만을 제시하는 종교생활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는 진정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고 그분의 멍에를 매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십자가를 통해서 부활에 이르는 방법을 구체적으로 습득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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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사제들을 향한 악마의 공격에 대한 소고

먼저 사제들의 위치를 잘 알아야 한다.
사제들이 하는 일은, 사람들을 '성화(聖化)'
즉, 사람들이 하느님을 알고 하느님 가까이로 가게끔 도와주는 것이다.
악마들로서는 치명적일 수 밖에 없다.
'거룩한' 사제들은 손짓 한 번으로 사람들이 자신들이 축복 받았다고 느끼게끔 한다.
축복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이지만,
사제가 마음을 담아 전하는 강복의 위력은 한 사람의 하루를 밝힐 수 있다.
그 밖에도 사제가 거행하는 고해성사와 성체성사는
그 사효성(일어나는 일 만으로 이루어지는 효력) 자체 만으로 위대한 힘을 지닌다.
그렇기에 사제들은 보통 사람들의 배에 해당하는 악마들의 유혹의 대상이 된다.

악마가 할 최선의 작업은,
그 사제직의 성스러움을 제거하는 작업이다.
그래서 악마들이 하는 짓은
사람들이 그 사제의 인간됨을 보고
코웃음을 치게끔 만드는 일이 우선이다.
결국 그의 모든 사제직의 직무수행마저도
사람들에게 "무의미"하게 보이도록 하는 게 주된 목적이다.

그래서 그가 가진 인간적 약점을 최우선의 공격 대상으로 삼는다.
그것은 '이성에 대한 욕구'가 될 수도 있고,
'재물에 대한 탐욕'이 될 수도 있으며,
'명예, 권력을 추구하는 마음'이 될 수도 있다.

누구는 이성을 돌처럼 바라보고 돈을 하찮게 여기지만,
다른 한편으로 은근히 명예욕과 지배하려는 마음이 대단할 수 있으며,
누구는 돈이나 명예, 권력에는 아무 관심이 없지만 이성에 대한 자신의 욕구를 견디지 못할 수도 있다.
또 누구는 '나은 생활', '윤택함'에 관심을 갖고 재물의 종이 되어간다.

사제직은 '나약한 인간'에게 선물로 주어진 것으로서
우리는 그 인간이 아니라 그가 지닌 사제직을 존경할 필요가 있다.

악마의 목적은 그 '인간의 나약성'을 교묘하게 유혹해서 끝까지 드러내어
그가 지닌 '사제직'이 더럽혀…

[중요] 하느님을 알기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알고 싶어합니다. 지극히 당연한 일이겠지요. 뭔가 위대하고 거대한 분이 우리를 만드신 것 같은데 그런 분에 대해서 제대로 안다면 생을 살아가는 데에 얼마나 많은 도움이 되겠습니까. 하지만 그분에 대해서 안다는 것은 좀처럼 쉬운 일이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 그러니 이렇게 많은 시간 동안 하느님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고 외쳐대는 종교가 있음에도 여전히 사람들은 하느님에 대해서 모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이런 상황 자체에서 우리는 여러가지를 생각해 볼 수 있게 됩니다. 하느님은 그 자체로 알기 힘든 분이 아닐까요? 아니면 우리 자체 안에 그분에 대해서 알기 힘든 어떤 모종의 시스템이 존재하는 건 아닐까요?

첫번째 의문에 대해서 다양한 관점으로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하느님 당신 자체가 알기 힘든 분이 아닌가? 그렇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일단 하느님은 ‘무한’한 분이시고 ‘영원’하신 분이시니 ‘유한’하고 ‘한계’가 있는 우리가 그분을 파악할 수 없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겠지요.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분을 아예 전혀 알 수 없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에게는 당신과 닮은 속성이 있어서 우리가 원하기만 한다면 그분에 대해서 알아 나가고 배워 나갈 수 있으니까요. 그러니 이 문제에 대해서는 ‘완전히 파악하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그분을 아는 것은 가능하다’ 정도로 전제하고 넘어갈 수 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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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적 면담의 구체적인 환경

영적 면담이라는 것은 일단은 서로 맞대면을 하는 것이 참으로 중요합니다. 인간이 의사를 전달하는 데에는 오직 ‘언어’만이 그 수단이 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상대의 표정과 따스한 환대 등등 여러가지 면으로 서로를 받아들이게 됩니다. 인터넷이나 전화로 상담을 하는 경우에는 많은 다른 인격적 부분들이 결여되기 때문에 면담의 방향이 엉뚱한 곳으로 치달을 수 있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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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해소 이외의 환경에서 장기적인 면담을 하는 경우는 거의 없습니다. 거의 모든 케이스는 한 번의 개인 면담으로 끝나는 것이 보통이고 장기적으로 한 사제에게 영적인 지도를 받기를 원하는 경우는 늘 이용할 수 있는 고해의 시간을 이용해야 합니다. 수도원이나 신학교, 또는 본당처럼 서로 같은 지역에 머무르지 않는 이상, 구역을 벗어난 곳에서 찾아온 내담자가 ‘장기면담’을 요청할 때에는 그가 사는 곳 주변에서 합당한 인물을 찾게 도와주는 것이 좋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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