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자들은 그 말씀을 알아듣지 못하였다. 그 뜻이 감추어져 있어서 이해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그들은 그 말씀에 관하여 묻는 것도 두려워하였다. (루카 9,45)
우리의 눈은 가림막이 있으면 건너편을 보지 못합니다. 우리의 귀는 방음벽이 있으면 근처의 소리를 듣지 못합니다. 우리의 영혼도 그에 상응하는 가리는 존재가 있으면 아주 가까이 있는 것도 감지하지 못합니다.
영혼의 이해력은 정말 엄청난 것입니다. 우리의 영혼은 지금의 문명을 이루어 내었습니다. 이는 다른 동물들이 같은 시대를 살아오면서 절대로 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그런 우리도 감히 다가서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바로 ‘진리’에 대한 이해입니다.
누군가가 기사를 읽으면 그 기사 안에서 설명하는 것들을 이해할 수 있게 됩니다. 왜냐하면 기사는 사실을 바탕으로 쓰여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가 언제 어디서 무엇을 어떻게 왜 같은 것들에 대해서 파악하게 됩니다.
하지만 소설이나 영화는 조금 다릅니다. 여기에는 원작자가 의도하는 바가 숨어 있습니다. 그래서 그런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서 인간은 가리워져 있는 저자나 감독의 의도를 파악해 내어야 합니다. 그것은 슬픔일 수도 있고, 기쁨일 수도 있으며, 진한 감동일 수도 있습니다.
헌데 우리는 신앙인으로 ‘하느님의 말씀’을 지니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이시지요. 그리고 우리는 그분을 바로 곁에서 관찰해 보지만 우리가 가까이 다가서면 다가설수록 그분은 더욱 드높이 계신 분으로 드러납니다. 우리가 그분에 대해서 알면 알수록 그분의 심오함은 더욱 깊어지게 됩니다.
그 가운데 바로 그분의 ‘사랑’이 있습니다. 의인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은 때로 존재했지만 죄인들을 위해서 죽겠다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그분을 이해하기 힘들어 합니다. 그리고 자신들도 소위 ‘물들까봐’, 즉 자신들도 그분의 행위에 가담해야 할까봐 심지어는 묻기까지 두려워하기도 합니다.
우리의 영혼은 ‘이기성’이라는 가림막으로 가리워져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누군가의 숭고한 자기 증여와 온전한 사랑에 대해서 우리는 둔감할 수 밖에 없습니다.
사실 말씀이 자신을 숨기는 것이 아닙니다. 말씀은 자신을 환하게 드러냅니다. 우리 스스로 우리의 나약함 뒤로 숨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씀의 진리를 파악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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