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주님의 수난과 죽음(마르코 15장)


마르코 복음 15장

주님의 수난과 죽음

마지막 장이다. 8주(중간에 2주를 공소 축제 9일기도 때문에 가지 못해서 실제로는 10주)간의 긴 여정을 마무리할 시간이다. 예수님은 이제 빌라도 앞에 서시고 모함이 가득한 재판을 받으시고 조롱과 수난을 당하시고 죽으시고 부활하신다.

이 장에 들어가면서 우리가 그 분위기를 느껴야 하는 것은,
만연해오는 어둠의 세력이다.
어둠의 세력은 크고 거대하고 강한 듯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굉장히 빈약하고 허술하다.
그들은 진리와 선에 기반하지 않아서 그렇다.
온갖 거짓과 술수로 예수님을 몰아대지만,
예수님은 그 어둠 속을 '진실과 침묵'으로 일관하셨고,
그 정황을 판단하려고 애를 쓰는 빌라도는 '무엇을 생각할지 알 수 없었다.'
(한국 성경에서는 '이상하게 여겼다'로 나온다.)

우리는 상대를 논리적으로 반박하려고 애를 쓴다.
하지만 때로 무작정 자신의 신조를 들이대면서
논리성을 파괴하는 사람들 앞에서는 '진실'한 증언은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런 자리에서는 차라리 침묵하는 것이 더 나은 법이다.

앞에 사과를 두고 이 사과의 품종을 논하려는 자리에
'오렌지가 맛있다'고 우겨대는 사람과는 할 말이 없는 법이다.

하지만 때로는 진실을 밝혀야 할 자리에서 침묵하는 이들도 있다.
이 경우의 침묵은 '거짓증언'과 맞먹는다.
분명 진실한 증언이 요구되는 자리에서
자기에게 다가올 비난이 두려워서 '침묵'으로 일관해서는 안된다.
이런 두 가지 침묵의 자리를 잘 구분하고
침묵해야 할 때에 침묵하고,
말 해야 할 때에 말해야 할 것이다.

병사들은 예수를 데리고 거짓 경배를 한다.
나름 차릴 건 다 차려준다. 관도 씌우고 왕홀(지팡이)도 들리고
자주색 옷(고귀한 신분을 상징하는 색)도 입힌다.
하지만 이 모든 건 예수님을 조롱하기 위한 것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일 수 있다.
전례를 아무리 거룩하게 차리더라도
그 준비하는 자의 마음에, 또 참여하는 자의 마음에
예수님을 향한 진솔한 사랑이 없다면,
우리는 이 로마 병사들이 행한 독성적인 행위를 하고 있는 것과 다를 바 없다.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할지어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박히신다.
그리고 높이 높이 들어올려진다.
우리 그리스도교의 신앙을 상징하는 십자가,
우리에게 구원을 가져다 주는 십자나무를 죄인들 스스로 들어올리고 있는 형상이다.
병사들은 자기들이 세상을 구원할 나무를 들어올리고 있다는 인식도 못하고,
그 거룩한 자리에 함께하고 있다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한 채로,
(상상을 해 보라, 지금의 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그 자리, 우리 구원 그 자체이신 분의
희생 제사의 자리에 있다면 그 얼마나 고귀하고 거룩한 순간이겠는가?)
그저 예수님이 마지막으로 남긴 옷가지나 따먹기를 하고 있다.
좌우로 죄인들도 십자가에 달리고,
사람들을 지나다니며 조롱을 멈추지 않는다.
법에 정통하고 안다하는 수석 사제들도 마찬가지였고,
심지어는 옆에 달린 죄인도 마찬가지였다.

예수님은 돌아가신다.
"나의 하느님, 나의 하느님, 어찌하여 저를 버리시나이까?"
라는 의미심장한 말과 함께.
버림받은 하느님의 외아들...
이 십자가 죽음의 신비는 '부활'이 뒤따라오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 없는 영역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음'과 '부활'은 떼어놓을 수 없고,
또 반대로 예수님의 '부활'은 '죽음'없이는 이해할 수 없다.

예수님의 죽음 곁에는 4명의 여자가 등장한다. 마리아 막달레나.
예수님의 어머니, 야고보와 요셉의 어머니, 살로메.
정작 죽음의 순간을 함께하겠다던 제자들은 온데간데 없고,
가장 나약해 보이는 존재들만이 예수님의 죽음을 지킨다.

그리고 예수님은 무덤에 묻히신다.
하느님의 나라를 기다리는 명망있는 의회 의원에 의해서
커다란 돌무덤에(여자들이 자기들의 힘으로 함부로 치울 수 없는 그 무덤에...) 묻히신다.
그리고 그 자리를 마리아 막달레나와 요셉의 어머니 마리아가 지켜서 있다.
(16장도 하고 싶었는데... 양이 너무 많아진다. 다음 기회에...)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