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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

성령

'거룩한 영', '하느님의 영' 삼위일체의 한 위격으로서 하느님과 같은 분이신 그분은 예수님 부활 이후 사도들에게 불혀의 모양으로, 또 그 이전에 예수님의 세례 때에 비둘기의 모양으로 내려오시면서 당신을 형상화하셨다.

헌데 요즘 이 '성령'이라는 말을 들으면 이상한 걸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성령의 역동성을 '왁자지껄함과 소란스러움'으로, 성령의 은사를, 전통 무속의 신내림에 견줄 정도의 '기이한 현상들과 방언'으로 뒤바꾸어 버리려는 시도들이다.

진정한 역동성은 단순히 춤을 추고, 율동을 하고, 노래를 부른다고 나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령의 열매 중의 하나인 기쁨의 표현방식에 불과할 뿐 진정한 역동성이란 이런 것이다. 즉 말씀을 품에 안고 있다가 '때가 찼을 때에' 언제라도 실행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마치 병사가 늘 훈련을 통해서 자신을 단련시켜 놓았다가 상황이 닥치면 맡은 책무를 주저없이 바로 해내는 모습과도 같다. 이것이 진정한 '역동성'의 의미이다. 성령을 늘 흐르게 하여 두어 언제라도 내가 성령에 힘입어 나서야 할 때에 나설 수 있는 것, 그것이 진정한 역동성인 것이다. 그렇지 않고 많은 청년들이 '성령'이라는 미명 하에 그저 밴드 반주나 찾고 뭔가 소란스러이 기쁨을 만끽할 수 있는 자리만 찾는 모습을 가끔씩 볼 때면 조금은 안타까운 마음이다.

성령의 은사라는 면에서는 주로 입을 요상하게 움직여 이상한 소리(랄랄랄랄랄랄랄...)를 내는 '방언'과 '안수를 하면 넘어짐'을 떠올리는 사람이 많은데, 진정한 은사는 그런 게 아니다. 서간에서 말하는 성령의 은사 중 하나인 '신령한 언어'라는 것은 그 소리가 퍼져 우리 귀에 듣기에 이상한 언어가 아니라 전혀 듣지 못한 새로운 언어, 즉 예수님의 사랑의 언어를 하는 사람을 말한다. 즉 세상 사람들이 익히 아는 언어는 '누가 날 때리면 고소하고 보상금을 받아내라'라는 것인 한편 신령한 언어, 새로운 언어, 사랑의 언어는 '그런 이를 용서하고 축복해주어라'라는 것이다.
다른 한 편 성경 그 어디에도 안수를 해서 한 사람이 다리에 힘이 풀려 넘어갔다는 구절은 없다. 그건 그 사람이 육체적으로 나약하거나 아니면 그 순간 넘어지고 싶었거나, 아니면 그를 넘어뜨린 사람이 좀 넘어져달라고 부탁했을 여러 가능성들이 존재한다. 은사라는 것은 공동체의 지체들이 제각기 할 일을 하도록 주어진 것이다. 손은 손으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의 은사이고, 발은 발로서 할 수 있는 일이 자신의 은사가 된다. 교회 내의 지체 가운데에서도 이런 각각의 은사들이 존재하는데 믿음, 치유, 기적, 예언, 식별 등등의 온갖 은사가 존재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은사라는 것이 청한다고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은사는 오직 하느님께서 당신의 선물로 당신이 원하는 사람에게 내려주는 것이고, 우리는 다만 그렇게 주어진 것을 식별하고 감사히 받은 뒤에 겸손하게 그것이 필요한 이에게 도움을 줄 뿐이다. 특히 치유의 은사를 받은 이들은 예수님의 본보기를 잘 따라야 한다. 그것을 대놓고 드러내어 자신의 명망이 쌓이게 할 것이 아니라, 조용한 곳에서 '함구령'과 더불어 그 은사를 드러내어야 한다. 자칫해서 하느님에게서 받은 은사를 자신의 다른 목적으로 쓰려는 이들에게는 하느님이 주신 것이니 언제라도 하느님이 되가져가실 수 있다.

자 성령을 기이한 방식으로 받아들이는 이들에 대해서 이야기를 좀 해 보았다. 그렇다면 이 성령을 우리는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여야 할까?

성령에 대한 여러가지 표현과 비유가 있지만, 개인적으로 선호하는 것은 '바람'이다. 성령께서는 활동하시는 동안에는 느낄 수 있지만, 손으로 잡으려고 들면 절대로 잡히지 않는다. 우리 신앙인들은 그 성령이 언제라도 머무실 수 있는 집과 같다. 다만 우리가 할 일은 다른 잡것이 우리 안에 머물지 않도록, 늘 '성찰'과 '회개'로 집을 깨끗이 하고, 그분이 들어오고 나가시는 길을 미리 '기도'로서 다져놓는 것이다. 이렇게 우리를 성령께서 머무실 궁전으로 잘 꾸며 놓는다면, 성령께서는 당신이 원하실 때에 우리에게 들어오셔서 우리를 하느님께로 한 단계 더 들어높여 주실 것이다. 그러지 않고 세상 것에 잔뜩 빠져 집을 더럽게 만들어 놓는다면, 그 집에 합당한 존재, 즉 '악령'이 자유로이 드나들게 될 것이고 언젠가는 자리를 잡아 버리고 말 것이다.

항구한 성사생활과 기도생활, 그것이 '성령'을 우리 안에 모시는 지름길이다. 그것이 '성령운동'의 본질이 되어야 하고, 나머지 특별한 대회나 세미나는 '양념'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 양념을 치지 않더라도 음식은 본 재료로 충분히 맛을 낼 수 있고, 때로 본 요리에 맞지도 않는 양념을 치면 음식을 버릴 수도 있다는 걸 잊지 않았으면 좋겠다. 성령운동에 동참하시는 모든 분들에게 순간적인 겉꾸민 활달함보다는 그리스도의 그윽한 향기가 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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