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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난해함


신앙의 난해함

신앙에 관한 건 왜 이리도 힘들게만 느껴질까? 수학처럼 1+1=2라고 추상적인 관념 안에서 명확하게 설명해낼 순 없는걸까? 아니면 자연과학처럼 뭔가를 세밀하게 관찰하고 결론을 얻을 순 없는걸까?

한편으론 그렇다고 할 수 있고 다른 한 편으론 불가능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는 면에서는 하느님께서 한 분이시고 그분이 세우신 영적 차원의 질서가 변함이 없기 때문이고, 그렇지 않다는 면에서는 각 인간마다 삶 안에서 직접 마주하는 상황이 무척 다르고, 하느님의 영역 가운데 우리가 절대로 범접할 수 없는 무한하고 신비적인 영역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서, '사랑하라', '선을 행하라'는 법칙은 절대로 변함이 없다. 하지만 무엇이 '사랑'이고 무엇이 '선을 행하는 것'인지는 각 개인의 자리에서 서로 다른 양상을 띄게 된다.

예컨대, 여기 성전 건축을 위해 봉헌하는 여러 상황들이 있다.
1) 그야 말로 본당의 성전을 위해 적은 돈이지만 능력껏 봉헌하려고 하는 사람.
2) 이 봉헌을 통해 주임 신부님의 맘에 들어서 다른 뭔가를 이루려는 사람.
3) 다른 현세적 축복을 얻으려고 빚을 내어가며 봉헌하는 사람.
4) 하느님의 진정한 축복과 현세적인 보상 사이에서 갈등하면서 봉헌하는 사람.
5) '가진 걸 다 바쳐라'는 부르심을 듣고 그것을 그대로 실천해버리는 사람.

모르긴 해도, 사람별로 모두 제 나름의 이유를 만들어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각자의 상황에서 저마다의 '사랑'과 '선'은 다른 양상을 띄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같은 행위를 하면서도 누구에게는 '선'이 되고, 누구에게는 '악'이 되며, 또 다른 이에게는 '갈등의 상황'이 되기도 하고 또 누구에게는 '신적인 영역'에 동참하는 것이기도 하다. 내가 적어놓고도 참 정신이 없다.

그런 고로 우리가 걸어가는 '신앙'의 길은 난해하게 느껴질 수 밖에 없다. 그럼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

지금까지 교회가 취해온 방법은, 모든 케이스를 식별하고 그것에 답을 내리는 식이었다. 이럴 때는 이렇게 저럴 때는 저렇게 식이었다. 그러다보니 '교회법'이라는 책이 점점 두꺼워지기 시작했고, 아무도 그 모든 걸 외우는 사람이 없게 되었다. 예수님께서 새롭게 주신 계명은 하나 뿐이다.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처럼 너희도 서로 사랑하여라.' 예수님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모든 걸 바로 세운다. 지금까지 교회가 해 온 노력을 과소평가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완성해야 할 필요가 있다. 그 유일한 방법은 오직 '사랑' 뿐이다. 우리 주님의 사랑, 십자가 위에서 죄인들을 위해 피를 흘린 사랑을 이해하는 것이 최우선 과제가 될 것이다. 세상의 모든 교회가, 모든 사제들이, 모든 신자들이 이 하나의 목적을 위해 함께 움직인다면, 이 세상이 바뀌는 것도 크게 어렵지 않을 것이다.

하느님께서 인간이 되시어 십자가 위에서 죄인을 위해 피흘린 사랑...
참으로 명료하면서도 우리가 절대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신비적인 사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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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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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