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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례


"신부님 장례 하기 전에 하나 알려 드릴께요."

아까 낮에 장례를 갔는데 넉살 좋은 반장 아줌마가 날 불러 앉힌다.

"이 집이 이 동네 토박이거든요. 한참 전부터 여기 살았었어요. 근데 오늘 돌아가신 할아버지의 부인이 한참 전에 돌아가셨어요. 그때만 해도 여기는 시골이었고 지금 있는 본당도 없었어요. 그때 이 집 아들내미가 온 시내 본당을 돌아다니면서 사제를 찾은 거예요. 하지만 아무도 와 주려 하지 않았죠. 그래서 그때부터 섭섭해서는 성당에 인연을 끊기로 해서 절대로 나오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 이 자리도 제가 일부러 신부님을 부른 거예요."

그러냐고, 알았다며 장례에 들어갔다. 차라리 몰랐으면 순진하게 모르는 채로 그저 죽음을 잘 준비하라고 하고 올 것을 알고 나니 괜스레 신경이 더 쓰였다. 이럴 땐 솔직하게 느끼는 걸 이야기하는 게 최고다.

"사실, 많은 장례를 다니지만, 여전히 죽음이라는 건 아직 저에겐 미스터리한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어디에선가 와서는 어디론가 가지요. 자기가 원해서 온 사람도 없고 자기가 원해서 가는 사람도 없어요. 물론 자살하는 사람은 있지만 자기 삶을 단 하루라도 일분이라도 늘릴 수 있는 사람은 없지요. 때가 되면 다들 가는 거예요. 우리가 우리의 생명을 어찌할 수 없다면, 생명의 주인이 따로 있다는 소리인데 우리 믿는 사람들은 그분을 '하느님'이라고 부르지요. 그럼 한 사람에게 죽음은 마지막 말인가요? 죽음으로 모든 게 끝나나요? 지금 우리 앞에 시신이 놓여 있어서 알 수 있듯이 몸은 이 땅에 그대로 남지만 우리 영혼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가 여기 모인 거잖아요. 그 영혼을 위해서 말예요. 그럼 그분이 원하시는 게 있을 텐데 그건 다름아닌 '사랑'이예요. 하지만 우린 그걸 모른채로 세상 일들에 한참 마음을 쓰면서 서로 미워하고 증오하고 용서하지 않고 그러다가 세상을 떠나 버리지요. 가장 위험한 일이 뭔지 아세요? 그건 준비없는 죽음이예요. 어느 순간 가는데, 하느님 앞에 서서는 '주님 저 세상에서 커다란 집 가지고 있었어요.'라고 자랑해봐야 소용이 없죠. 결국엔 다 여기다 두고 가니까요. 우리 영혼의 손에 들고 갈 수 있는 유일한 건 '사랑' 뿐이예요. 그래서 '지금' 살아있는 동안 많이들 사랑하셔야 해요. 제가 이 죽은 망자를 위해서 왔다고 생각하지 마세요. 저는 여러분들을 위해서 왔습니다. 여러분들이 듣고 깨달으시라고 온 거예요. 죽은 이는 항상 우리에게 생명의 소중함을 일깨우거든요. '행복'은 어디에서 오나요? 많은 돈을 가지면 행복하던가요? 아니예요. 만일에 제가 돈 벌기를 원했으면 지금 이곳에서 사제로 살고있지 않지요. 아마 한국에서 일하면서 돈 벌었을 거예요. 그게 아니란 걸 깨달아서 지금 사제로 사는거죠. 아무리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아내나 남편과 다투고나면 음식 맛이 없지요? 행복은 재화에서 나오는 게 아니라, '사랑'에서 나오는 거예요. 집의 꼬맹이가 '아빠 사랑해' 하고 다가올 때 그때에 사랑을 느끼고 행복해지는거죠. 지금 많이 사랑하세요 제발. 그리고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하는 건 언제나 좋은 일이예요. 우리의 사랑의 표현이죠. 여러분들 풍습에 따라서 9일기도를 하실텐데 하다못해 하루에 주님의 기도 한 번이라도 바치세요. 주님의 기도 모르면 성호라도 그어 주세요. 우리는 기도에 참 구두쇠죠. 텔레비전 보기는 그토록 좋아 하면서 말예요. 제발 죽은 이를 위해서 기도해 주세요."

대충 이렇게 말을 하고 예식을 마쳤다. 사람들에게 관에 성수를 뿌리게 시키고는 살짝 빠져 나오려는데 그 냉담한다는 아들이 다가와서 악수를 청하며 '고맙습니다. 신부님'하고 말을 걸어왔다. '성당 나와요.'라고 하면서 어깨를 툭 쳐줬다. 그리고는 함께 웃었다.

이걸 다 기억하고 있는 나도 참 장하다.
스스로 칭찬해줘야징~ 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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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