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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중 28주 주일강론

연중 28주 주일

'~까지'와 '~부터'

우리가 곧잘 하느님에게 드리려고 하는 것은 "~까지"인 경우가 많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정해진 규율이 있고, 거기까지를 채우려는 것이다. 결국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드리기 싫은 걸 억지로 드리려는 셈이다. 본디는 나의 것인데 마지못해 하느님에게 드리는 꼴이 된다. 이것이 "~까지"가 상징하는 바이다.

하지만 정작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것은 "~부터"이다. 우리가 마땅히 이루어 나가야 하는 것, 바로 거기서부터 하느님께서는 무언가 바라신다. 이미 규정되어 있고 이미 이루어야 하는 것은 마땅히 이루어야 하는 것이고 마땅히 지켜나가야 하는 것이고,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바라시는 것은 거기서부터 무엇을 더 할 수 있는 가가 더 중요한 것이다. 우리의 주님 뿌리지도 않은 데에서 거두시고 심지도 않은 데에서 수확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부자청년은 "~까지"의 최고봉에 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부터"를 전혀 알지 못했다. 하느님이 가진 영원한 생명이 탐나기는 하는데 마지막 순간까지 자신이 가진 것을 포기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었다. 하느님의 영생을 자신의 손아귀에 넣고 싶은데, 다른 건 다 지키고 가꿀 수 있어도 영생은 자신을 포기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비밀을 깨칠 수가 없었다. 무언가를 잡기 위해서는 손에 있는 것을 놓아야 하는데 그러고 싶지는 않았던 것이다. 부자 청년에게 일어났던 사건은 다름아닌 '자신의 의지'와 '하느님 의지'의 충돌이었다.

지금까지 어렵게 설명했다. 간단하게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사랑의 규율에 얽매이지 말고 사랑을 실천하라." 사랑은 법을 행하는 데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실천하는 데에서 나온다. 교회의 10계명을 나날이 새기면서 어기지 않도록 조바심을 내는 것보다는 눈 앞의 내 형제에게 웃는 얼굴로 미소 한 번을 던지는 것이 하느님께는 더욱 아름다운 모습이라는 걸 어찌 모르는가?

스스로 사랑의 열매를 맺어라.

두려움이 섞인 소극적인 자세보다 사랑이 가득한 적극적인 자세로 하느님께서 바라시는 바를 찾아 나서야 한다.

법으로 규정되고 문자로 제정될 수 있는 수많은 것들은 죽은 것들이다. 어느 성인이 하루에 기도를 3번씩 했다고 그것이 그리스도인 생활의 참된 모습이라고 정해 버린다면 이제 겨우 하느님을 배워 알고 일주일에 기도를 한 번씩 하려고 시작하는 사람은 그 기준에 비해 턱없이 부족하기만 한 죄인으로 규정되어 버리고 만다. 그렇지 않다!!!!!! 하느님의 눈에는 늘 하루에 3번의 기도를 바치던 그 성인의 기도보다 오히려 이제 갓 기도를 시작하는 그의 기도가 더 달가운 법이다.

내가 똑같은 이야기를 몇번씩이나 강조하는 이유는, 이런 사고 체계에 갇혀 살아가는 이가 수도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성경을 읽으면서 바리사이들에게 쯧쯧하며 혀를 찬다. 하지만 실상 우리 자신의 모습은 바라보지 못하는 소경들인 것이다. 보다 중요한 것은 사랑의 적극성이고 하느님의 뜻을 각자의 자리에서 시작해 나가는 것이지, 그러한 일련의 삶들을 정해두고 액자에 걸어놓고 쳐다보는 게 아니란 말이다.

이걸 깨닫는 것이 바로 1독서에서 말하는 하느님의 지혜이다. 우리가 학교에서 배우는 건 '지식'일 따름이다. 이 '지식'들은 잘 쌓아두면 '현금'과 맞바꿀 수 있다. '지식'을 잘 쌓고 시험을 잘 치르면 의사고 판사고 검사고 될 수 있다. 하지만 이 하느님의 '지혜'가 부족한 사람은 영원한 생명에 다가가지 못한다. '지혜'가 전혀 없고 '지식'이 많아서 가난한 이들에게 돈을 뜯어먹으려는 법률가나, 필요이상의 과다 의료비를 청구하는 의사들이 그 예가 될 것이다.

화답송은 이런 깨달음이 바로 하느님 당신에게서 온다는 것을 노래한다. 모든 것을 생기있게 만드는 것은 우리의 노력이 아니라 바로 하느님의 자애와 사랑이라는 것이다.

제2독서는 모든 것을 올바로 분별하실 능력이 있는 하느님의 말씀을 설명하고 있다. "사람 속을 꿰찔러 혼과 영을 가르고 관절과 골수를 갈라, 마음의 생각과 속셈을 가려내는" 그 말씀에서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니 일찌기 어두운 마음, 나 자신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탐욕스런 생각들을 버리고 하느님 앞에 꼬리 내리라는 경고에 가까운 말씀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모든 것을 알고 계시는 하느님 앞에 응큼하게도 더 마음을 움츠려 숨어들려고 합니다. 아, 어리석은지고...

그리고 복음에서는 이 가르침을 한 부자청년에 대한 예화와 뒤이은 실제적인 '부자'들에 대한 경고로 완성하고 있습니다. 하느님의 사랑 앞에서 무언가를 쥐고 있으려는 노력이 얼마나 허황한 것인지를 고스란히 드러내어 줍니다. 그것이 돈이든 명예든, 인간관계이든, 하느님의 뜻을 거스르는 무언가를 쥐고 있다면 내려 놓아야 할 것입니다.

또 손가락을 쳐다보는 사람이 생길까 싶어 노파심에 말합니다. 모든 이가 예수님이 부자청년에게 말한 것처럼 가진걸 당장 다 팔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한 때가 다가올 수도 있겠지만 지금의 우리들에게는 과분한 요구임에 틀림 없습니다. 다만 예수님께서는 여러분들에게 '한 걸음' 앞으로 나아가기를 기다리십니다.

예수님 때문에 잃은 자 되기를 즐기십시오. 현세고 내세고 받을 축복이 클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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