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치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인 끼아라 루빅의 '부르짖음'을 읽었다. 자신의 영성과 간략한 사업회의 진행과정을 담은 창시자의 저서였다. 십자가의 버림받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바탕으로 '일치'를 향한 간절한 열망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수많은 카리스마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갈수록 성소의 고갈을 겪으면서 어떻게든 인원을 충당해보려는 안쓰러운 모습들이 적지않다. 그러면서 정작 '본질'적인 것은 점점 잃어가고 자신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의 생존이 더욱 중요시되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서서 때로는 가증스러울 때도 있다. 창설자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없고, 자신들의 생활의 편의와 복지를 충당할 거리를 찾는 모습이랄까. 이런 모습은 비단 수도회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교회이지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모두 내팽개치자는 것도 아니지만, 적당한 때가 이르러 과연 우리가 지향했던 길을 올바르게 걷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가장 기본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이외에 저마다의 책무로 생겨난 공동체들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확충, 보완, 변경, 축소될 여지를 충분히 두어야 하고 각 공동체의 장상들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굳건히 하면서 다가오는 도전들에 핵심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요청에 귀를 잘 기울이고 고리타분해져서 원 기력을 상실한 가지를 단장할 줄도 알아야 한다.(이게 말이 쉬운거다. 때가 되어 결정의 시기가 오면 생각지도 못했던 반대에 부딪히게 되리라.) 하지만 그러기엔 덩치가 너무 커져 버린 듯한 느낌이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혼란 스러운 것이 그 사상의 근본을 교회 권위로 부터 인정받은 후, 모여든 사람들이 엇나가기 시작하는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상의 근본이 그릇된 것임을 확증했으나 어떻게든 모여든 사람들이 그 열정으로 그 공동체를 꾸준히 떠받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진정한 일치를 위해서는 '중심'을 올바로 잡고 있는 게 필요하다. 아무리 몸이 만신창이라도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가려는 목적지가 뚜렷하면 하나 남은 팔로도 기어 기어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반면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중심이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면, 결국 그 몸은 건강한 몸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헛수고를 하는 셈이 된다. 우리가 지금의 교회에 희망을 둘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언제나 교회는 말도 탈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저런 오류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굳게 쥐고 있는 믿음은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약점과 오류를 보고는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공격해 들어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그때마다 '중심'을 올바로 세운 이들이 등장해 사방에서 교회를 향해 다가오는 공격들에 의연히 맞서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한다. 막무가내의 통합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진정한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포콜라레 운동의 창시자인 끼아라 루빅의 '부르짖음'을 읽었다. 자신의 영성과 간략한 사업회의 진행과정을 담은 창시자의 저서였다. 십자가의 버림받은 예수님을 향한 열정을 바탕으로 '일치'를 향한 간절한 열망이 담겨있는 책이었다.
수많은 카리스마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갈수록 성소의 고갈을 겪으면서 어떻게든 인원을 충당해보려는 안쓰러운 모습들이 적지않다. 그러면서 정작 '본질'적인 것은 점점 잃어가고 자신들이 이루어놓은 공동체의 생존이 더욱 중요시되는 모습은 안쓰러움을 넘어서서 때로는 가증스러울 때도 있다. 창설자가 진정으로 사랑했던 예수 그리스도는 없고, 자신들의 생활의 편의와 복지를 충당할 거리를 찾는 모습이랄까. 이런 모습은 비단 수도회 뿐만 아니라 교회 자체에서도 발견되곤 한다. 우리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교회이지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위한 교회가 아니기 때문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이루어 놓은 것들을 모두 내팽개치자는 것도 아니지만, 적당한 때가 이르러 과연 우리가 지향했던 길을 올바르게 걷고 있는지 점검할 필요가 있다.
가장 기본 '하느님의 백성'인 교회 이외에 저마다의 책무로 생겨난 공동체들은 시대의 변화에 발맞추어 확충, 보완, 변경, 축소될 여지를 충분히 두어야 하고 각 공동체의 장상들은 자신의 카리스마를 굳건히 하면서 다가오는 도전들에 핵심을 잘 분별할 줄 아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 새로운 요청에 귀를 잘 기울이고 고리타분해져서 원 기력을 상실한 가지를 단장할 줄도 알아야 한다.(이게 말이 쉬운거다. 때가 되어 결정의 시기가 오면 생각지도 못했던 반대에 부딪히게 되리라.) 하지만 그러기엔 덩치가 너무 커져 버린 듯한 느낌이다.
이와 더불어 한 가지 혼란 스러운 것이 그 사상의 근본을 교회 권위로 부터 인정받은 후, 모여든 사람들이 엇나가기 시작하는 공동체가 있는가 하면, 반대로, 사상의 근본이 그릇된 것임을 확증했으나 어떻게든 모여든 사람들이 그 열정으로 그 공동체를 꾸준히 떠받치는 경우도 생겨나고 있다.
진정한 일치를 위해서는 '중심'을 올바로 잡고 있는 게 필요하다. 아무리 몸이 만신창이라도 중심을 잘 잡고 있으면, 가려는 목적지가 뚜렷하면 하나 남은 팔로도 기어 기어 어떻게든 목적지에 도달하게 될 것이다. 반면 몸이 아무리 건강해도 중심이 올바로 서 있지 못하면, 결국 그 몸은 건강한 몸으로 아무리 노력해도 결국 헛수고를 하는 셈이 된다. 우리가 지금의 교회에 희망을 둘 수 있는 부분은 바로 여기에서 나온다.
언제나 교회는 말도 탈도 많았다. 그리고 이런 저런 오류도 많았다. 하지만 결국 우리가 굳게 쥐고 있는 믿음은 우리 주 그리스도에게서 나오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의 약점과 오류를 보고는 이쪽으로 또 저쪽으로 공격해 들어오게 될 것이다. 하지만 걱정할 것 없다. 그때마다 '중심'을 올바로 세운 이들이 등장해 사방에서 교회를 향해 다가오는 공격들에 의연히 맞서 이겨낼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하나' 되어야 한다. 막무가내의 통합이 아니라, 성령을 통한 진정한 '다양성 속의 일치'를 이루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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