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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자리

자기 자리

자기가 어디 있는지를 아는 사람은 참으로 복된 사람이다.
왜냐하면 바로 그 자리에서 비로소 한 걸음 나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내가 어디 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자기가 올라서 있다고 생각했던 모래 언덕이 바람에 훌훌 날리고 나면
정작 자신은 헛됨 위에 있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는 사람이 있다.
반면 자신은 처절한 구렁텅이 속에 빠져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곳이야말로 자신이 모든 걸 새롭게 새울 굳건한 기반이라는 걸 뒤는게 아는 사람도 있다.

높은 자리에 있는 이들은 자기들 자리가 거기라고 생각하고
안하무인이 되는 경우가 많다.
훗날 고스란히 원래의 자리로 돌아오면서 후회하게 될 사람들이다.

반대로 자기 스스로를 죄인이라고 생각하면서 일어나 걸을 기력도 회복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런 이들을 도와주어 의연히 어두움을 떨쳐내고 영혼의 길을 걸어가게 도와 주어야 한다.

사람은 결국 다 같은 위치에서 시작하게 된다.
헌데 시간상으로 능력상으로 앞섰다고 어리석게 자부하는 인간들이 많다.
나이가 많다고, 돈을 많이 벌었다고, 지위가 높다고, 학식이 많다고...
그럼 아프리카에서 태어나 부모는 영양 실조로 죽어버리고, 평생을 노동자로 살면서 알파벳 하나 깨우치지 못한 이는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없는가?
천만에 말씀 만만에 콩떡이다.

영적 사정 안에서 모든 인간의 출발점은 바로 자기가 서 있는 자리에서부터이다.
그 자리에서 하느님을 향해서 한 걸음 나아가는 사람은 진보하는 것이고,
하느님을 등지고 세상을 향해 한 걸음 나아가면 후퇴하는 사람이다.

하느님은 우리에게 '시간'을 선물로 주셨고,
우리는 그 시간이라 불리는 '기회' 속에서 많이 사랑해야 한다.


글쎄... 기우인지는 몰라도, 이런 영적 사정을 하는 중에 투덜대는 사람들이 있다.
'배부른 소리 하고 자빠졌네... 지금 세상이 어느 땐데... 그럼 다들 수도원 들어가란 말인가?
신부로 탱자탱자 놀면서 주변에서 주는 밥만 얻어 먹으니 속이 편한 모양이지?'
존엄한 인간의 삶을 유지하면서 자기 밥벌이를 해 먹는 일은...
우리가 영혼의 길을 걷기 시작할때에 하느님께서 합당하게 마련해 주신다는 것이 우리의 믿음이다.
바로 여기에서부터 실패하기에 적지 않은 사람들이 세상의 두려움에 휩싸여
본격적인 발걸음은 떼어 놓지도 못하는 형국이다.

베네딕도 16세 교황님이 요셉 랏칭거 추기경으로 신앙 교리성 장관을 할 때에
그리스도교 어제와 오늘이라는 책의 서문에서 잘 표현했듯이...
지금의 교회의 입장은 '어릿광대'의 모습이다.
서커스단에 불이 나서 마을로 불이 번져 모두가 타 죽게 될 지경인데,
그 소식을 알리러 간 어릿광대를 보고
사람들은 '참 연기 잘한다'며 박수를 쳐 주고 있다...
그래도 상관없다.
그 어릿광대가 흘리는 진솔한 눈물을 보고
누군가는 감화되어 믿기 시작할 테니까.
그러면 그 다음부터는 그 마을 사람의 말을 듣고 누군가는 움직일거다.
사제직을 통해서 하느님으로부터 축복을 받았지만,
그 축복을 통해 사람들은 도리어 색안경을 끼고 사제들을 바라본다.
이러한 상황에 지친 사제들이 도리어 세상 사람들과 어울려 놀아나기도 한다.

아니, 아니지. 이럴 때일수록 더 힘을 내어야지.
'해보이 안되더라'가 아니라, '그래도 또 해봐야지'가 되어야지.
그게 우리가 믿는 십자가의 신앙인걸...
예수님은 실패한 듯 보였지만,
사실은 십자가로 씨를 심은 분이신걸...

'자기 자리' 이야기하다가 또 옆길로 샜다. ㅎㅎㅎ
내가 요새 늘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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