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본 콘텐츠로 건너뛰기

영적 초심자를 위한 가이드


영적 초심자를 위한 가이드

세속 생활에 찌들어 살아가다가
어쩌다 영성의 향기를 맡고는
영적인 여정을 걸어가고파 하는 이들이 간혹 있습니다.

헌데 문제는 이런 '초심자'들을 위한
올바른 가이드라인이 준비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지요.
그들은 대체로 이런 누를 범합니다.
일단은 막연히 '성경'이 좋다는 건 알았으니
읽어보자고 마음 먹고는 '창세기'부터 시작을 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머지않아 곧 실망, 혹은 포기를 하지요.
초심자에게 성경의 창세기만큼 난해한 서적은 없기 때문입니다.

성경을 택하셨다면,
다음의 길을 따라가시길 권해 드립니다.
먼저는 사도들의 서간입니다.
보다 실제적이고 구체적인 예시들이 담겨 있기 때문이지요.
'묵시록'은 절대로 손대지 마십시오.
묵시록에서 사용되는 상징과 기호들은
신학을 수십년 공부한 학자들에게도 어려운 대상입니다.
서간들을 읽기를 마쳤으면 복음서를 펴십시오.
그리고 마르코, 마태오, 루카, 사도행전 순으로 읽으십시오.
이걸 마치고 나면 '요한'에 손을 대십시오.
이렇게 신약을 한바퀴 훑으셨다면,
비로소 구약의 말씀들을 손 댈 기초적인 바탕을 갖추시게 되는 겁니다.
하지만 구약은 가급적 좋은 안내서와 함께 읽어나가시기 바라겠습니다.

다음은 '기도'입니다.
초심자들은 하느님께로 다가가고 싶다는 열망을 품고
무턱대고 소위 '좋다는 기도'들을 시작합니다.
간혹 성공하는 케이스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실패하게 마련입니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도'에 대한 올바른 개념이 쌓이기도 전에
무리하게 '기도'를 시도하기 때문입니다.
초심자에게 하루의 기도는 아침에 일어나서 바치는 성호경과
자기전에 바치는 성호경으로 충분합니다.
이게 익숙해지면, 기도의 양을 늘리십시오.
마치 아이가 걸음마를 배우듯이,
처음에는 무리가 가지 않게 몸을 뒤집는 것부터 시작하는 겁니다.
그리고 다리에 힘이 생기면 일어나는 연습을 해야지요.
처음부터 묵주의 9일기도라느니, 가톨릭 기도서의 아침기도 저녁기도는
당연 초심자들에게 무리입니다.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마치 거기에 적힌 대로 아침, 저녁, 식사 전 후 기도를 바치지 않으면
큰일이나 날 것 처럼 생각하지만,
아무런 기도를 바쳐오지 않던 초심자들에게는
'성호경'하나로도 충분한 법입니다.
그렇게 기도의 양을 조금씩 늘려가다보면
어느 날엔가는 기도문을 외우게 되고,
더 나아가서는 '성무일도'까지도 해 볼 생각을 갖게 되는 것입니다.

영적독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가톨릭 관련 서원에 가면
책장 가득히 꽂힌 책들 가운데에서 길을 잃게 됩니다.
그리고는 누가 좋다는 책을 무턱대고 읽어보게 되지요.
'칠층산', '천국의 열쇠', '고백록' 같은 두꺼운 책들은
그저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한숨이 나오기도 합니다.
먼저는 쉽고 가벼운 에세이 형태의 글들을 찾으셔야 합니다.
믿을만한 영적 지도자를 찾아서 추천을 받는 것이 좋습니다.
각자의 저자마다 스타일이 달라서,
누구는 감성을 자극하는 글을 쓰고,
누구는 이성을 기반으로 하는 글을 씁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이성'쪽을 더 선호해서,
헨리 나웬 신부님보다는 토마스 머튼 신부님들의 에세이집들을 읽을 때가 더 좋았습니다.
그리고 번역자에 따라서도 난해함이 존재해서,
누구는 정말 쉬운 글을 엉망으로 번역해 놓기도 합니다.
서원에 가서 첫 단락의 1-2페이지 가량을 읽어서
이해가 되는 책들을 고르십시오.
그러지 않고 유명하다고 하는 책을 추천받아 샀다가
한 두어장을 읽고나서는
책장에 처박아두고는 먼지가 뽀얗게 쌓이는 경우가 많습니다.

성사생활에 관해서는 주로 '미사'와 '고해성사'를 자주 접하게 될 것입니다.
'미사'는 가까운 본당에 나가시면 되는데
각 미사마다의 분위기가 다를 수 있기 때문에
조용한 걸 좋아하시는 분은 '새벽미사'를
활달한 걸 좋아하시는 분은 '학생미사나 청년미사'
진중하고 엄숙한 걸 좋아하시는 분은 '교중미사'라는 선택의 여지가
본당마다 존재하리라 생각합니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시골 본당은 '꾸준함'의 훈련이라 생각하시고
본당에 마련된 미사에 꾸준히 참여하시기 바라겠습니다.

고해성사에서 초심자들은 흔히 '세심증'에 걸리기 쉽습니다.
갓 시작한 여정에 누가 될까봐, 이런 저런 죄들을 고해하고도
찝질해 하고, 고해가 끝났는데 문득 과거의 어두움이 떠올라서
이걸 새로 고해를 해야 하는지 고민도 되고...
저 역시 이런 세심증 때문에 고생을 했습니다.
같은 증세로 힘들어하시는 분에게 말씀 드리겠습니다.
'하느님은 째째한 분이 아닙니다.'
한 번 마음을 잡고 고해했다면, 의도적으로 뭔가를 숨기지 않은 다음에는
미처 고해하지 못한 이전의 다른 죄들도 모두 떨이해서 용서받았다고
'믿으십시오.'
다만 고해 전에 잘 '성찰'하는 것이 관건입니다.
판공성사의 시기에 부끄러움에 고해 직전에 대충 슬슬 몇가지 죄들 꺼내보았다가
고해소에 들어가서는 얼른 쏟아버리고 나오는 식의 고해를 하기 일쑤라서
언제나 그런 찜찜함이 남는 것입니다.
고해 전에 잘 성찰하시고 스스로 범한 잘못들을 올바로 뉘우치시길 바랍니다.
그럼 고해는 99% 완료된 것이고,
나머지 1%를 고해소 안에서 사제의 사죄경을 통해 완성하는 것입니다.

일단은 이 정도면,
초심자를 위한 기초적인 가이드라인으로서는 큰 무리가 없다고 봅니다.
다들 하느님을 향해서 나아가는 여정에
그 첫 발을 잘 내딛으시길 바랍니다.
^^

이 블로그의 인기 게시물

성체를 모시는 방법

- 성체를 손으로 모시는 게 신성모독이라는데 사실인가요? 이게 무슨 소린가 싶었습니다. 일단 설명을 시작했습니다. - 교회는 전통적으로 성체를 입으로 직접 받아 모셔왔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주님의 수난 만찬때에 제자들과 모여 함께 나눈 빵을 제자들이 무릎을 꿇고 입만 벌리고 받아 모셨을까요? 아닙니다. 그들은 손으로 빵을 받아서 나누어 옆의 동료들에게 나누어가며 먹었습니다. 하지만 성체에 대한 공경이 날이 갈수록 더해 감에 따라 부스러기 하나라도 흘리지 않으려는 극진한 공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제단 앞으로 나와 무릎을 꿇고 입을 벌리고 받아모시게 한 것이지요. 그러다가 신자들의 수가 너무 많아지고 또 입으로 모시다가 자꾸 사제의 손에 침이 발리니 위생상의 문제도 있고 해서 손으로 받아 모시게 한 것입니다. 사실 한국과 같은 곳은 입으로 받아 모시는 사람이 거의 없습니다. 거의 전부가 손으로 받아 모십니다. - 그럼 그런 표현을 하는 사람은 왜 그러는 건가요? - 제가 보았을 때에는 성체에 대한 극진한 존경심을 드러내기 위해서 그런 말을 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성체를 공경하고 존경하는 마음을 드러내는 것은 좋지만 손으로 모시는 사람을 잘못되었다고 할 필요는 없지요. 여기서는(볼리비아에서는) 입으로 모시는 사람과 손으로 모시는 사람의 두 부류가 있고 둘 다 존중받아야 합니다. 하지만 입으로 모시는 이들의 혀가 제 손에 자꾸만 닿는 것은 분명히 사실이고 이는 굉장히 비위생적인 것은 사실입니다. 그리고 입으로 모시는 것이 성체를 흘리고 떨어뜨릴 가능성이 더 높습니다. 그래서 손으로 모시는 것이 보다 안정적이지요. 다만 손으로 모실 때에는 미사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왼손 아래에 오른손을 받치는 올바른 자세를 갖추고 왼손으로 성체를 받아 뒤의 사람이 앞으로 나와 성체를 모실 수 있도록 옆으로 살짝 비켜나서 성체를 모셔야 합니다. 성체를 모시고 나서 손에 남은 부스러기를 함부로 다루지 말고 입으로 가져가서 혓바닥으로 깨끗이 처리할 필요가 있지요

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미사 봉헌

미사를 봉헌한다는 말은 무슨 뜻일까요? 간단하게 우리가 알고 있는 바를 말하자면 사무실에 가서 해당하는 비용을 내고 기도하고 싶은 사람의 이름을 올리는 행위를 ‘미사 봉헌’이라고 말합니다. 헌데 우리는 그 뒤에 어떤 일이 벌어지는지 알고 있을까요? 미사를 봉헌하면 어떤 효과가 나타나는 것일까요? 무엇보다도 연옥 영혼들을 위한 효과가 일어납니다. 우리가 망자를 기억하면서 그를 위해서 드리는 미사는 그 영혼에게 효과가 미칩니다. 물론 무슨 효과가 얼마나 미칠지 우리는 올바로 이해하지 못하지만 우리의 공로가 아니라 예수님의 수난의 공로로 인해서 그 영혼은 자비를 입게 되고 자신이 채워야 할 수난의 시간을 메꿀 수 있습니다. 이는 수많은 성인들의 실제적인 증언으로 우리가 알게 된 것입니다. 또한 살아있는 이들을 위해서 드리는 미사도 그 효과를 발휘합니다. 하지만 이 때에는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이 이루어집니다. 우리의 정성은 받아들여지지만 그 은총의 효과는 하느님이 원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집니다. 병자가 건강하기를 바랄 수 있지만 그의 건강의 회복은 오직 하느님의 뜻에 달려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그가 건강을 회복하고서 어떤 일이 벌어질지까지 아는 분이십니다. 하지만 이러한 효과들이 단순히 ‘기계적’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미사를 드리는 우리의 정성이 중요한 것이지요. 돈을 지불하는 것이 우리의 정성의 일부분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지닌 돈은 결국 우리의 정성을 모아서 벌어들인 돈이기 때문에 우리는 예물을 통해서 우리의 삶을 봉헌하는 행위를 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미사에 참례하는 것이 더욱 소중한 정성입니다. 미사에 참례해서 진심으로 그 미사의 말씀을 듣고 성찬의 전례에 온전히 참례하게 된다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미사의 은총을 더욱 배가 될 것이 틀림 없습니다. 나아가 우리가 그런 미사 참례를 통해서 드리는 봉헌의 행위로 우리의 삶 자체는 변화될 것이고 무엇보다도 그 모든 은총의 결과물은 바로 우리의 몫이 될 것입니다. 저는 진실한 마음으로 미사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