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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사

성사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은총을 보이는 표징을 통해서 드러내는 것... 이 교회가 가르치는 내용이다. 물론 이에 따라서 서론부터 시작해서 각 성사별로 역사와 그 내용을 설명하는 두꺼운 강의록과 책들을 읽어야 했다.

무엇보다도 성사의 근원은 '예수님'이다. 보이지 않는 하느님의 드러냄. 근데 어떻게 드러내신걸까? 만일 예수님 얼굴에 여드름이라도 하나 있었더라면 그것도 일종의 성사였던걸까? 예수님이 인간으로서 이 땅에 오셔서 드러내고자 했던 가장 최상은 '수난, 죽음, 부활'로 드러난다. 우리 인류를 위한 하느님의 계획이다. 우리를 '수난'에로 이끌로, '죽음'을 겪게 해서, '부활'을 선물하려는 것이 하느님의 '사랑'의 계획이다. 예수님이 취미생활을 뭘 하셨고, 말투는 어땠으며, 옷차림은 어떠했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란 말이다.

이 예수님을 가장 잘 담고 있는 것은 다름아닌 예수님의 제자단인 '교회'이다. 모든 신자들은 이 '교회'를 통해서 예수님을 배우고 그분의 삶을 따르고자 노력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마땅히 교회를 사랑해야 하고 예수님께서 교회 안에 남겨주신 '교계제도' 역시도 사랑하고 존중해야 한다. 하지만 여기에도 예수님의 경우와 마찬가지의 것이 존재한다. 언제나 가장 핵심을, 하느님의 그 크신 '사랑'을 잘 쥐고 있어야 한다. 신부님이 어느 날 너무 피곤해서 신자에게 짜증을 낸다고 해서 그것이 예수님의 '수난과 죽음과 부활'의 핵심 줄기를 상하게 할 순 없다. 오히려 '이유없는 수난'으로 치자면 더 나을지도 모르겠다. 어느 수녀님이 인간적으로 부당한 성격을 지니고 있다고 해서 그것이 원 줄기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영역에서 많은 신자들이 '본질'이 상했다고 생각하면서 '교회'를 저버리기 시작한다.

교회의 부족함은 분명 안타까운 모습이지만, 늘 있어왔던 부분이고, 앞으로도 늘 상존할 부분이다. 그런 부족함으로 인해서 발생한 다른 보화들 역시 우리는 같은 교회 안에 지니고 있다. 결국 '타인의 부족함을 받아들이면서 사랑을 키우라고' 하느님은 이 교회를 이 땅에 선물한 것이다. 사실 어느 신학교나 다 이 훈련을 하고, 어느 수도회 공동체도 마찬가지의 훈련을 한다. '본당 공동체'라고 예외는 아니다. 그 안의 수많은 구성원들이 서로의 부족함을 드러내면서도 하느님의 보다 큰 '사랑'으로 '하나'를 이루려고 노력하는 그 가운데에 다름아닌 우리의 '구원'이 있다.

이런 큰 흐름을 도와주기 위해서 상정해 놓은 장치들이 바로 7성사인 것이다. 교회 안에 새로 태어나는 '세례성사', 하루하루 밥을 먹듯이 예수님의 몸과 피로 양육되는 '성체성사', 어느덧 장성한 몸이 되어 이제는 막연히 받아먹는 게 아니라 남들을 하느님께로 이끄는 성령의 힘을 얻는 '견진성사', 하느님께서 창조때 마련하신 두 인격이 하느님을 통해 온전히 하나됨을 드러내는 '혼배성사', 특별히 하느님의 일에 전념하겠노라고 약속하는 '성품성사', 우리의 허물들을 하느님의 크신 사랑으로 치유하는 '고해성사', 우리의 영과 육의 모든 아픔을 하느님께 고스란히 내어 맡기고 구원을 얻는 '병자성사'...

이 정도만 알아도 여러분들은 '성사'에 대해서 사람들을 이끌 적절한 지성적 소양을 갖추게 된다. 하지만 세부적인 사항에 들어가면서도 언제나 분명히 잃지 말아야 할 핵심 줄기가 있다. 그것은 바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이시고, 그분이 가르치신 단 하나의 계명인 '사랑'이다. 사랑하는 사람은 '성사'를 완성하는 사람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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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부님이랑 목사님은 뭐가 달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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