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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교 7년차

선교를 한 지 햇수로만 7년차가 되었습니다. 아직 많이 모자란 느낌이 들지만 한국에서 파견된 여느 선교사에게 좀처럼 뒤지지는 않는 경력인 셈이지요.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느끼는 것은 선교는 연차로 따지는 게 아니라는 생각입니다.

선교는 ‘헌신’으로 따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무엇에 헌신하는가 하는 것도 중요합니다. 그 수많은 시간을 자기 자신의 목적을 위해 헌신할 수도 있기 때문이지요. 어느 공동체에 건물을 짓고 그룹을 형성하고, 언뜻 외적으로 드러나는 그 수많은 결과물들을 통해서 스스로를 내세우고 선교를 잘 하고 있다고 착각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굉장히 강한 유혹이지요.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선교의 나날들이 부정되는 느낌이 드니까요.

헌신이라는 의미의 이 선교는 바로 ‘하느님의 뜻’을 향한 헌신이어야 합니다. 하느님이 원하는 곳에 가고 하느님이 원하는 일을 하는 것이지요. 하느님의 이름을 팔아서 자신의 뜻을 이루는 선교가 되어서는 안된다는 말입니다. 선교지의 사람들의 숫자를 늘리는 일은 사실 어렵지 않습니다. 부자 나라에 가서 불쌍한 표정을 좀 짓고, 불쌍한 현실을 이야기하고 그렇게 얻어온 기금으로 사람들을 동원해서 눈에 드러나는 건물을 짓고 입에 먹거리를 넣어주면 사람들을 모이게 됩니다.

하지만 그렇게 모인 이들은 그렇게 사라져 갑니다. 우리 나라의 전쟁 후에 밀려든 신앙인들을 두고 하는 말인 ‘밀가루 신자’라는 말 속에는 그나마 저의 막연한 환상이 깃들어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체험에 비추어 이제는 말할 수 있습니다. 참된 믿음의 헌신이 없이는 밀가루 신자가 보통 신자가 되지는 못한다는 것이지요. 그것은 선교사의 차원에서도 그리고 받아들이는 신앙인의 차원에서도 마찬가지인 셈입니다.

돈이나 다른 목적으로 모인 이들은 그 목적이 사라지고 나면 그들의 마음도 멀어져 갑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동기’를 제공하는 목적으로 그러한 것들을 이용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본질이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단지 사람들이 모이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 선교사들은 그러한 방법들에 중독되어 갑니다. 갖가지 행사와 건축과 구호활동을 통해서 사람들이 모여드는 것을 즐기지만 결국 그 선교사 자신의 내부에 그 어떤 ‘소금’도 없기에 결국 사람들에게 짠 맛을 주지 못하고 결국 자신이 지니고 있던 물질적인 것들, 재주들이 사라지고 나면 그 사람들도 덩달아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도 그렇게라도 모으는 것이 좋지 않은가?” 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거듭 이야기하지만 ‘동기’를 제공할 수는 있어도 그것이 핵심의 자리를 차지해서는 안됩니다. 그렇게 모으는 게 무조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모으고 난 뒤에 무엇을 줄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성찰과 준비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지요.

흔히들 어려운 나라에서 말도 다르고 문화도 다른 데 그저 사는 것만으로 선교라고 말을 하곤 합니다. 아닙니다. 비록 말이 다르고 문화가 달라도 뜨거운 신앙을 지닌 사람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총 동원해서 신앙을 전합니다. 하지만 이런 의욕이 없는 사람, 그저 외국 생활을 시험삼아서 체험해보려고, 아니면 등떠밀려서 억지로 오는 이들은 온갖 민폐만 끼치고 떠나게 됩니다.

선교를 하러 왔으면 ‘선교’를 해야 합니다. 선교라는 말의 진정한 의미는 가르침을 전한다는 것이지요. 우리는 가난해서 더욱 희망이 없어 보이는 이 나라에 물질문명을 가르치러 오는 사람들이 아니라 영원한 희망을 심어주기 위해 오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대한 진지한 성찰이 없으면 우리는 NGO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그런 일들은 세상 사람들이 오히려 우리보다 더 잘 합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해야 하고 그분의 영원한 생명을 선포해야 합니다. 이것이 선교 7년차 사제의 체험에서 우러나오는 작은 결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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