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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러나는 속내

외적인 면에 영향을 받는 우리들입니다. 천사같은 외면을 보면 천사려니 생각하고 악마같은 외면을 보면 악마라고 생각해 버리고 말지요. 그것이 ‘첫인상’으로 자리잡습니다. 그래서 첫인상이라는 것은 언뜻 중요한 듯 싶지만 실제적으로 크게 믿을 것은 되지 못합니다. 사람을 알게 된다는 것은 절대로 외면으로만 이루어질 수 없는 일입니다. 오히려 내면으로 더 중요한 가치들이 오고 가게 마련이지요.

하지만 속을 알 수 없으니 문제입니다. 무엇을 숨기고 있는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껍데기를 아무리 들여다 보아도 전혀 알 수 없지요. 그래서 오해라는 것이 생겨나게 되는 것입니다. 선한 이들을 악한 자로 판단하고 악한 이들을 선한 이들로 착각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과연 드러나지 않을까요? 속이 썩은 사과는 언젠가 그 썩은 내를 드러내게 마련입니다. 껍질의 색깔이 서서히 변하거나 냄새가 심하게 나거나 하곤 하지요. 사람도 마찬가지여서 언제까지나 내면을 숨기고 살 수는 없습니다. 그 썩은 모습들이 드러나게 마련이지요.

사람들의 행동에는 정상적인 범위가 있게 마련입니다. 그 범위를 넘어서서 과한 행동이 드러나면 반드시 그 이유가 있게 마련입니다. 여러분들이 아무것도 해 준 것이 없는데 갑작스럽게 다가오는 이들이 있다면 조심할 필요가 있는 셈이지요. 하지만 분별력이 떨어지는 이들은 그런 일을 당하면 경계하기는 커녕 도리어 좋아하고 맙니다. 자신의 허영심이 채워지기 때문이지요.

외모에 과하게 치중하는 사람 안에는 반드시 허영심이 있게 마련입니다. 대화마다 ‘돈’ 이야기가 나오는 사람은 탐욕이 존재한다는 걸 의미하지요. 반대로 억울한 일을 당해도 드러내지 않고 묵묵히 지내는 사람, 매사에 신중한 사람은 내면에 지혜가 있다는 걸 의미합니다. 가벼운 사람들은 조금만 섭섭한 일을 당해도 금세 광고를 하고 다니지요.

우리 안에 무엇을 간직할 것인가 하는 것은 결국 우리가 무엇을 드러내게 될 것인가를 결정하게 됩니다. 단순히 외적인 치장을 아무리 한다고 해서 우리의 어두운 내면이 가리워지지 않고, 겉으로 아무리 평범하게 처신한다고 해서 우리가 지닌 참된 빛이 가리워지지도 않습니다. 저마다 제가 가진 걸 드러낼 뿐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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