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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극과 반응

- 어머~ 너 옷이 그게 뭐니? 핏이 안 살잖아?

적지 않은 이들은 주변으로부터 이런 말을 들으면 굉장히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정말 자신의 옷이 그런가 생각하게 되고 돌아보게 되지요. 그런 말을 꺼내는 사람에게도 문제는 있지만 그런 말에 반응하는 사람에게도 문제는 존재하는 셈입니다.

자극과 반응에 있어서 ‘자극’이라는 것은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세상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으로 우리의 수용체, 감각기관을 자극할 것입니다. 우리가 오감을 지닌 이유는 자극을 수용하기 위해서입니다. 우리가 완전한 밀실에 갇혀 아무 소리도 듣지 못하고 아무 형상도 바라보지 못하고, 냄새도 맛도, 또 아무것도 피부로 느낄 수 없게 되지 않는 이상 우리 주변에서는 온갖 자극이 밀려들어오게 되어 있습니다.

그럼 결국 문제는 그걸 수용하는 우리들입니다. 우리들은 그것을 현명하게 수용할 줄 알아야 합니다. 모든 것을 들어오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는 것이지요. 남들이 내 욕을 한다고 그대로 그걸 욕으로 받아들이고 남들이 내 칭찬을 한다고 헤벌쭉 기분좋아질 필요도 없습니다. 들어높여진 건 반드시 떨어져 깨어지게 마련이니까요.

내가 나임을 인식하는 것, 나 자신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은 참으로 중요한 일입니다. 나는 어느 유명 연예인도 아니고, 다른 누구도 아닌 나 자신입니다. 그리고 내가 지금 지니고 있는 모든 것은 나에게 소중한 것들입니다. 그것이 예쁘고 아름다워서 소중한 것이 아니라 그 자체로 소중한 것입니다. 눈이 더 예뻐질 수는 있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그러나 흔히 우리는 눈의 본래적 기능을 너무나 ‘당연시’ 여기고 더 예쁜 눈을 갖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가 행여 수술이라도 하던 중에 자칫 눈이라도 다치고 나면 자신이 무슨 짓을 벌였던 것인지 알게 되는 것이지요.

잘 생김과 못 생김이라는 것은 굉장히 주관적인 것입니다. 물론 얼굴 형태가 뒤틀려진 사람이 있어서 그런 이들을 위해서 ‘성형수술’이 존재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미 멀쩡하고 부모님이 보기에는 마냥 예쁘기만 한 얼굴을 일부러 칼을 대는 것은 그런 수술을 원하는 이들에게 ‘문제’가 있음을 반증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에게 들어오는 자극들에 너무나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얼마든지 무시하고 지나칠 수 있는 반응들에 섬세하게 반응하곤 하지요. 그러한 모든 ‘반응’들이 결국 나를 소진시키는 것들입니다. 나는 나로서 충분합니다. 예쁘건 못낫건 그건 부차적인 문제이지요. 그래서 마음 공부가 시급합니다. 마음이 이쁜 사람은 자신의 얼굴에 구애받지 않습니다. 하지만 세상의 못된 시선은 마음이 이쁜 이를 가만 두지 못합니다. 그래서 더 큰 자극을 줄 수 있는 바늘로 사정없이 찔러대려고 하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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