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을 받게 하시려는 것이다.(요한 3,16-17)
사람들이 하느님을 오해하는 것은 하느님을 ‘심판자’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접근법이 틀려 먹었습니다. ‘심판자’로 이해되는 하느님은 ‘죄지은 우리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해소하려고도 않고 나아가 하느님은 ‘심판자’시라 두렵게 느끼기만 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으로 가득한 인자하신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서 엇나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몰이해 속에서 하느님의 엄격한 이미지는 더욱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로 다가서지 못하니 적어도 죄를 피하게 하려고 엄하고 무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버린 셈이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죄를 피하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어 결국 죄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위의 성경구절을 다시 바라봅시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외아들마저도 제물로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길을 찾도록 도와주신 것이지요. 그 길은 규정과 율법과 속박의 길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길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이해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닫혀 버린 셈입니다. 우리의 어두움이 너무나 극심해서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퇴화되어 버린 셈이지요.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빛을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당신이 다가서면 그나마 있던 빛마저 사라져 버리고 어두움으로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지요. 마치 희미한 빛이 있으면 빛도 어두움도 희미하게 느껴지지만 밝고 강렬한 빛이 있으면 빛과 그림자가 뚜렷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강렬한 빛과 사람들의 어둠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같은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심판할 수 없는 셈이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지 않으시기로 작정했고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의 구성원들도 서로 사랑하도록 노력해야지요.
하지만 어느새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죄인들을 심판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고 있으니 이는 어둠의 영이 뿌린 ‘교만’의 씨앗이었습니다. 이는 서로를 갈라놓는 최고의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지요. 너와 나는 다르다는 생각,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우리 사이를 뿔뿔이 흩어놓고 있습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 길은 제도를 정비하는 게 아닙니다. ‘원류’를 찾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디에서 비롯하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천주교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종교가 없지만 선의 존재를 믿는 이들도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끼리의 교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톨릭이라는 말마디 자체가 ‘보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우리는 모든 이를 하느님에게로 이끌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는 이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한 형제들이고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하느님을 오해하는 것은 하느님을 ‘심판자’로 이해하기 때문입니다. 이래서는 접근법이 틀려 먹었습니다. ‘심판자’로 이해되는 하느님은 ‘죄지은 우리들’이 전제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죄를 해소하려고도 않고 나아가 하느님은 ‘심판자’시라 두렵게 느끼기만 합니다. 악순환의 연속이지요.
우리의 하느님은 ‘사랑으로 가득한 인자하신 아버지’입니다. 우리는 그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해서 엇나가기 시작했고 그렇게 몰이해 속에서 하느님의 엄격한 이미지는 더욱 굳어지게 되었습니다. 사랑에로 다가서지 못하니 적어도 죄를 피하게 하려고 엄하고 무서운 하느님의 이미지를 만들어 버린 셈이고, 사람들은 두려움에 벌벌 떨면서 죄를 피하려고는 하지만 한계가 있어 결국 죄에 떨어지고 마는 것이지요.
위의 성경구절을 다시 바라봅시다. 하느님은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셨습니다. 그래서 외아들마저도 제물로 내어주신 분이십니다. 그렇게 우리가 길을 찾도록 도와주신 것이지요. 그 길은 규정과 율법과 속박의 길이 아니라, 희망과 기쁨과 사랑의 길이었습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드러난 길이지요.
그러나 우리가 그 길을 이해하기에 우리의 마음은 너무나 닫혀 버린 셈입니다. 우리의 어두움이 너무나 극심해서 사랑을 이해할 수 있는 능력이 퇴화되어 버린 셈이지요. 그래서 사랑 자체이신 예수님은 당신의 빛을 교회를 통해서 드러내기로 마음 먹으셨습니다. 당신이 다가서면 그나마 있던 빛마저 사라져 버리고 어두움으로 도망쳐 버리기 때문이지요. 마치 희미한 빛이 있으면 빛도 어두움도 희미하게 느껴지지만 밝고 강렬한 빛이 있으면 빛과 그림자가 뚜렷해지는 것과 같습니다.
교회는 하느님의 강렬한 빛과 사람들의 어둠 사이에서 완충역할을 하는 셈입니다. 그래서 교회의 구성원들은 같은 죄인들입니다. 우리는 서로를 심판할 수 없는 셈이지요. 오직 예수님만이 우리를 심판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분은 그러지 않으시기로 작정했고 우리를 사랑하시기로 작정 하셨습니다. 그러니 우리 교회의 구성원들도 서로 사랑하도록 노력해야지요.
하지만 어느새 교회 안에서 스스로를 의인이라고 생각하고 죄인들을 심판하는 무리들이 생겨나고 있으니 이는 어둠의 영이 뿌린 ‘교만’의 씨앗이었습니다. 이는 서로를 갈라놓는 최고의 촉매제로 작용하고 있지요. 너와 나는 다르다는 생각, 나는 의인이고 너는 죄인이라는 생각이 우리 사이를 뿔뿔이 흩어놓고 있습니다.
다시 하나가 되는 길은 제도를 정비하는 게 아닙니다. ‘원류’를 찾는 것이지요. 우리가 어디에서 비롯하고 어디로 돌아가야 하는지를 바라보아야 하는 것입니다. 그때에야 천주교 신자도, 개신교 신자도, 불교 신자도, 종교가 없지만 선의 존재를 믿는 이들도 모두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끼리의 교회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톨릭이라는 말마디 자체가 ‘보편’이라는 의미를 지니고 있고 우리는 모든 이를 하느님에게로 이끌어야 하는 사명을 지니고 있는 이들입니다. 하느님의 사랑에서 제외되는 이는 없습니다. 우리 모두는 하느님의 자녀들인 한 형제들이고 머리는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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