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 하느님이 이렇게 말한다. 너는 마음이 교만하여, ′나는 신이다. 나는 신의 자리에, 바다 한가운데에 앉아 있다.′ 하고 말한다. 너는 신이 아니라 사람이면서도, 네 마음을 신의 마음에 비긴다. (에제 28,2)
우리가 하느님 앞에서 짓는 죄의 가장 기본적인 형태는 ‘교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즉 하느님보다 스스로를 뛰어난 사람으로 보는 것, 혹은 하느님이 없다고 가정하고 살아가는 것이지요. 사실 모든 죄는 이렇게 시작된다고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잊을 때, 혹은 의도적으로 무시할 때에 일어나는 것이지요.
우리가 전능하신 분을 늘 곁에 모시고 산다면 그분의 뜻에서 벗어날 수가 없을 것입니다. 매사에 하느님의 뜻을 우선시하고 찾으려고 노력하겠지요. 비록 우리의 나약함 때문에 오류를 범할 수는 있을지 몰라도 절대로 본인의 의지로 하느님을 벗어나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진정으로 알게 된 이가 죄를 짓는 일은 없는 셈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하느님의 존재를 망각하고 살아갑니다. 그러기에 스스로를 가장 높은 자리, 즉 신의 자리에 놓는 것이지요. 그와 동시에 우리는 우리가 오류가 많다는 것을 망각하는 것이지요. 우리는 곧잘 성질내고 참을성이 없고 어긋난 생각에 빠져들곤 하는데 그런 우리를 가장 높은 자리, 가장 중심 자리에 놓는 오류를 범하는 것입니다.
그 결과는 어떠할까요? 그는 하느님을 잃게 됩니다. 하느님이 모든 것의 근거가 되는데 그 하느님을 잃게 되면 그는 모든 것을 잃는 셈이지요. 그리고 그가 지니게 될 유일한 것은 자기 자신의 의지 하나 뿐입니다. 하느님을 거부하는 자신의 의지이지요. 그러나 그가 지상에 살아가는 동안에는 이를 올바로 인지하지 못합니다. 왜냐하면 지상에서는 그가 하느님 대신에 기쁨으로 삼을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탐욕을 채워줄 것들을 일시적으로 지니는 기쁨을 누리게 되고 그것을 자신의 근거로 삼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에게는 재물과 명예 권력과 같은 것들이 소중한 셈이지요. 그러한 것들이 자신의 존재의 이유를 지탱해 주는 셈이니까요.
그러나 하느님의 주권이 드러나는 때가 다가올 것입니다. 결국 그가 소유했던 것이 자신의 몫이 아니었다는 것이 드러나게 될 때가 다가오겠지요. 사람은 죽으면 십원 한 푼 들고 갈 수 없습니다. 심지어는 자신이 그렇게나 아끼던 육신도 자신의 것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것이지요. 그때 사람은 자신의 증오를 완성하게 되는 것입니다. 원래부터 맘에 들어하지 않던 하느님에 대한 증오를 극도로 발휘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한 인간은 스스로를 심판하게 됩니다. 영원한 어두움, 영원한 심판에 빠져드는 것이지요. 이것이 하느님 앞에 교만한 자의 운명입니다.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는 하늘 나라에 들어가기가 어려울 것이다. 내가 다시 너희에게 말한다.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구멍으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마태 19,23-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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