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를 존중하고 사랑할 때에는 ‘규정’이 그닥 필요가 없게 됩니다. 서로가 서로를 위해서 양보하고 상대가 바라는 것을 먼저 챙기려고 애쓸 때에는 사회는 그만큼 부드럽고 유동성이 있게 마련입니다. 어른은 아이를 참아주고, 젊은이는 어르신들을 참아줄 수 있게 되지요. 인간의 생이란 어린 시절, 또 나이가 들어 기능이 쇠퇴하면서 오류가 많은 법이니까요. 하지만 우리에게 내적 가치들이 점점 퇴행을 하기 시작하면서 우리는 참을성, 인내가 사라지게 되고 이 없어진 참을성의 자리에 ‘규정’이 들어서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규정을 어기는 이에게 우리는 정당하게 ‘분노’할 준비가 되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곧잘 분노하고 화를 냅니다. 그것도 아주 공정하고 정당하게 말이지요. 존재하는 규정을 지키지 않으니 우리는 그에 분노해야 하는 것입니다. 결국 이 분노는 사회의 약자에게 돌아가게 됩니다. 적합한 규정의 선에 들어오지 못하는 이들이지요. 헌데 여기에는 숨겨진 진리가 있습니다. 바로 언제라도 우리 스스로가 그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이지요. 아니, 사실 그렇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모두 늙게 될 것이고 기능이 퇴화될 것이며, 자주 잊고 실수하고 잘못을 저지르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 우리는 정당한 분노의 대상이 되겠지요. 주어진 규정을 지키지 못하는 사회의 약자가 되는 것입니다. 음식을 흘리면 안되는데 흘리고, 길을 잊어버리면 안되는데 잊어버리고, 스마트폰의 기능을 모두 활용해서 일을 처리하면 되는데 눈이 침침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때에는 우리의 젊은 시절을 회상하면서 서러워하고 한탄을 하게 되겠지요. 젊은이들이 노인들의 마음을 알아주기를 바라면서 말입니다. 하지만 정작 그들이 젊을 때에는 그런 마음의 여유를 지니지 못했던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이 저질러 놓은 것을 되받게 마련입니다. 우리는 지금부터 어르신들을 다른 눈길로 바라보아야 합니다. 우리는 관용과 이해와 사랑과 인내를 연습해야 합니다.
통상적으로 가톨릭의 성직자(거룩한 직분을 받은 자)를 신부님이라고 부르고 개신교의 목회자(회중을 사목하는 자)를 목사님이라고 부릅니다. 당연히 이를 올바로 구별하기 위해서는 가톨릭(또는 천주교)과 개신교의 차이를 알아야 하겠지요? 기독교라는 말은 ‘그리스도교’의 한자 음역을 한 단어를 의미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통상적으로 가톨릭과 개신교를 모두 포함하는 말입니다. 정확하게 표현하기 위해서는 천주교(가톨릭: 보편적)과 개신교(프로테스탄트: 저항)로 표기하는 것이 맞습니다. 먼저는 예수님입니다. 2000여년 전 인류사에서 한 인물이 등장을 했고 엄청난 이슈를 남기게 되었지요. 그리고 그를 추종하는 ‘그리스도인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소위 ‘믿는 이들의 공동체’인 교회가 생겨나게 된 것이지요. 그리고 이 교회는 역사를 통해서 그 덩치를 키우게 됩니다. 그리고 덩치가 커지니 만큼 순수했던 처음의 열정이 사라져가고 온갖 사람들이 그 안에 들어서게 되지요. 그리고 엉뚱한 움직임들이 많이 등장하게 됩니다. 즉 교회의 본질에서 벗어나는 많은 모습들이 보이게 되었지요. 돈에 대한 탐욕, 권력에 대한 집착과 같은 움직임들입니다. 그리고 자연스레 그에 반발하는 움직임이 등장하게 되지요. 그것이 바로 개신교의 시초인 셈입니다. 루터라는 인물이 95개조의 반박문을 쓰고 했다는 역사적인 이야기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입니다. 그로부터 개신교 형제들이 자기들의 신조를 들고 갈려 나오기 시작 했습니다. 그들은 오직 믿음, 오직 성경, 오직 은총과 같은 구호를 외치면서 가톨릭에서 갈려 나와 자신들이 진정한 초대교회의 정통성을 이어 받았다고 주장하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가톨릭은 여전히 가톨릭대로 자신들이 정통성을 이어가고 있다고 하고 있는 상황이 펼쳐지게 됩니다. 우리의 몸이 때로는 아플 수 있습니다. 하지만 몸이 아프다고 해서 성한 팔을 따로 잘라내지는 않는 것처럼 공동체도 마찬가지여야 합니다. 공동체가 아프면 모두 힘을 모아서 그 아픈 부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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