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행하여라, 자기들만 먹는 이스라엘의 목자들! 양 떼를 먹이는 것이 목자가 아니냐? 그런데 너희는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으면서, 양 떼는 먹이지 않는다. 너희는 약한 양들에게 원기를 북돋아 주지 않고 아픈 양을 고쳐 주지 않았으며, 부러진 양을 싸매 주지 않고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오지도, 잃어버린 양을 찾아오지도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렸다. 그들은 목자가 없어서 흩어져야 했다. 흩어진 채 온갖 들짐승의 먹이가 되었다. 산마다, 높은 언덕마다 내 양 떼가 길을 잃고 헤매었다. 내 양 떼가 온 세상에 흩어졌는데, 찾아보는 자도 없고 찾아오는 자도 없다. (에제 34,2-6)
목자들이란 양 떼를 먹이는 이들, 양 떼를 모으고 보호하고 보살피는 이들입니다. 이것이 직분을 맡은 이들의 사명이지요. 그가 사제이건 평신도이건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교회 안에서 모종의 직분을 맡게 되면 목자의 일을 나누어 맡게 되는 셈입니다. 그리고 그 목자의 일이라는 것은 양 떼를 모으고 보호하고 보살피는 일입니다.
헌데 그 일은 소홀히 하고 오히려 ‘젖을 짜 먹고 양털로 옷을 해 입으며 살진 놈을 잡아먹고,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리고, 양 떼를 흩어버리는’ 목자가 있어 하느님은 당신의 예언자를 보냅니다.
양들의 젖을 짜 먹는다는 것은 그들의 소출을 갈취한다는 것입니다. 일하지도 않으면서 그들의 재물을 누린다는 뜻이지요.
옷을 해 입는다는 것은 공연한 명예를 얻는 것을 의미합니다. 양 본연의 냄새를 풍기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덮어 쓴 양들의 명예를 얻는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살진 놈을 잡아먹는다는 것은 양들 가운데 가장 통통하게 살이 오른, 즉 참으로 신심이 깊고 열심한 신앙인의 신뢰를 무너뜨린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폭력과 강압으로 다스린다는 것은 그 반대, 즉 온유와 친절로 다스리는 것이 아니라 억지로 끌어 당기고 겁을 집어먹게 하고 횡포를 부린다는 것을 의미하지요.
나아가 그들은 다음과 같은 행동을 실천하지 않습니다.
약한 양들의 원기를 북돋운다는 것은 내면이 약한 이들, 여러가지 정신적인 아픔이나 영적인 아픔 속에서 힘들어하는 이들을 일으켜 세운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죄지은 이들에게 하느님의 자비를 알리고 부족한 이들에게 함께 가자고 손을 내미는 것이지요.
아픈 양을 고쳐준다는 것은 결함이 있는 양들을 치유한다는 의미입니다. 인간의 내면은 죄로 인해서 상처를 입을 수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나약해진 것이 아니라 병든 것이지요. 그런 양들은 치유가 필요합니다. 올바른 가르침과 사랑으로 치유를 이루어야 합니다.
부러진 양을 싸매는 것은 그 결함이 단순히 내적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외적으로 드러나는 이들을 말합니다. 내면의 은근한 죄가 아니라 공개적으로 드러난 죄인들도 애써 보듬고 싸매는 것을 말하지요.
흩어진 양을 도로 데려온다는 것은 정신이 산만해지고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양들을 다시 되찾아 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무엇이 참된 가르침인지를 알려주고 다시 올바로 생각할 수 있게끔 도와주는 것이지요.
잃어버린 양을 찾아 온다는 것은 우리 밖으로 벗어난, 그야말로 어둠의 길을 걷고 있는 양들 마저도 찾아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예언자 당시의 목자들은 이 일들을 전혀 하지 않은 것이지요.
목자가 그렇게 행동할 때에 양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됩니다. 그리고 흩어진 양 떼들은 온갖 들짐승들, 즉 세상의 온갖 추잡한 생각들의 희생양이 되어 버리지요. 양 떼는 그렇게 흩어지지만 찾아가는 이도 찾아오는 이도 없었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 모습에 너무나도 마음이 아프셨습니다.
목자가 꼭 사제라는 법은 없습니다. 사제는 신자들의 목자이고, 신자들은 세상에 흩어진 하느님의 자녀들의 목자 역할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어느 누구도 예외가 될 수 없습니다. 적어도 하느님의 뜻에 순명하는 양 떼가 되던가, 아니면 적어도 교회 욕을 먹이는 행동을 하는 신앙인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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