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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모님






그분께서는 당신 팔로 권능을 떨치시어, 마음속 생각이 교만한 자들을 흩으셨습니다. 통치자들을 왕좌에서 끌어내리시고, 비천한 이들을 들어 높이셨으며, 굶주린 이들을 좋은 것으로 배불리시고, 부유한 자들을 빈손으로 내치셨습니다. (루카 1,51)

성모님은 당신을 거의 드러내지 않습니다. 하지만 루카 복음의 이 구절에서만큼은 당신이 내면에 품고 있던 것을 가장 아름다운 찬미가로 드러내십니다. 사실 성모님은 가장 드높은 영성가셨지요.

하느님은 당신의 외아들을 담을 그릇을 아무것이나 선택한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정말 최고의 작품을 그린 화가가 그 작품을 쓰레기통에 담아 보관하진 않을 것입니다. 그는 그 작품에 걸맞는 액자를 만들어 그 액자 속에다 보관하여 사람들이 그 작품을 감상하는 데에 도움이 되게 할 것입니다.

성모님도 마찬가지로 선택된 분이셨습니다. 인류의 역사를 거쳐오면서 하느님은 당신의 아들을 보낼 만한 가장 적합한 인물을 고르고 또 고르신 것이지요. 그리고 바로 성모님이 선택된 것입니다.

성모님의 모습은 성경 안에서 많이 드러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루카 복음의 성모 찬송가는 그 하나 만으로도 성모님의 깊은 생각을 맛보기에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성모님은 겸손의 여왕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참된 겸손이라는 것은 하느님 앞에 드러나는 겸손이지요. 우리 인간의 본연의 모습을 이해하고 하느님 앞에 자신을 낮추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런 겸손된 인간을 반대로 가장 드높이 들어올리시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의 찬송가에는 상반되는 두 부류가 드러납니다. 한 부류는 마음 속 생각이 교만하고, 다른 이들을 통치하려고 하며, 부유한 이들입니다. 다른 한 부류는 비천하고 굶주린 이들이지요. 하지만 이는 단순히 외적인 모습을 두고 하는 표현이 아닙니다. 오히려 내적이고 영적인 표현이지요.

우리는 살아가면서 이런 두 부류의 사람을 마주하게 됩니다. 한 부류는 그 생각이 참으로 교만하고, 다른 이들을 지배하려는 생각으로 가득하고, 재화에 대한 탐욕이 가득합니다. 특히 실제적인 부자들 사이에서 이런 이들을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사실이나 재물이 없더라도 그 내면에 탐욕이 가득한 이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들은 다만 그럴 수 없어서 그러지 않을 뿐, 그들이 훗날 돈을 많이 버는 기회를 잡게 되면 지금의 부자이면서 교만한 이들과 전혀 다르지 않은 모습을 드러낼 이들이 되고 맙니다.

반대로 비천하고 굶주린 이들이 존재합니다. 그들은 영적으로 목마른 자들, 자신의 내면을 채워줄 생명의 물을 기다리는 자들입니다. 하느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것을 내어 주시면서 그들을 일으켜 세우시고 들어 높이십니다.

성모님은 바로 두번째 사람들을 대표하시는 분이십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어머니이셨지만 가장 겸손한 위치에 처해 있으셨고 또 언제나 하느님을 목말라 하신 분이시지요. 그래서 하느님은 그분을 가장 드높이 들어올려주신 것입니다.

성모님의 이 영성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성모님을 폄하하고 무시하곤 합니다. 그들은 장님이거나 혹은 알면서도 의도적으로 그렇게 하는 이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 가톨릭 신자들은 성모님의 본연의 위치를 올바로 이해하고 있어야 합니다. 성모님은 지상에 살아간 이들 중에 하느님의 최고의 선택을 받은 분이시고 또한 당신의 의지로서 그 선택에 합당하게 머무르신 분이시라는 것을 잊으면 안됩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특별한 보호를 받으신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당신의 의지가 전혀 개입되지 않았다는 것도 아닙니다. 성모님은 하느님의 약속에 충실하셨고 수많은 인고의 시간을 거치셨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기를 바랍니다.

자식이 고난을 당하면 괴로워하는 것이 부모입니다. 헌데 가장 순결하고 완전하고 선한 의지를 지닌 자녀가 가장 극악한 고통을 당할 때에 성모님의 마음은 과연 어떠하셨을까요? 성모님은 우리들이 아무리 사랑을 드려도 부족한 분이십니다.

하느님은 당신의 그릇을 오류 없이 선택하셨고, 성모님은 당신의 사명을 다 이루셨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은 다른 이들에게는 선사하지 못한 특별한 은총을 성모님에게 부어 주셨습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전인적인 모습 그대로 하늘에 불러 올리신 것이지요. 그것이 우리 가톨릭 교회의 신앙 고백입니다. 오늘, 성모 승천 대축일은 바로 그 사건을 기념하는 소중한 날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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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고로 겸손했던 성모 마리아 이셨근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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