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께서는 세례를 주라고 나를 보내신 것이 아니라 복음을 전하라고 보내셨습니다. 그리고 이 일을 말재주로 하라는 것이 아니었으니,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헛되지 않게 하려는 것입니다. (1코린 1,17)
“세례를 주는 게 복음을 전하는 거 아닌가요? 저는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요?”
세례는 중요한 성사임에 틀림 없습니다. 하지만 세례는 두가지 차원에서 바라볼 수 있습니다. 사실 모든 전례가 그러합니다. 모든 전례는 그 외적 행위와 내적 행위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때로 외적 행위가 부족하더라도 내적 행위가 충만하면 부족한 외적 행위는 충만한 내적 행위로 채워질 수 있습니다. 하지만 반대로 아무리 완벽한 외적 행위를 이루더라도 내적으로 전혀 준비되지 않은 행위라면 그 행위는 무의미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세례 역시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세례를 주는 이유는 그 사람이 ‘회개’ 하였음을, 옛 생활에서 벗어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가르쳐 주시는 길을 꿋꿋하게 걸어가겠다는 결심을 다진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헌데 그런 내적 행위는 전혀 채우지 않은 채로 심드렁한 표정으로 교리를 받고 세례 당일날 가서 이마에 물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세례의 외적 행위를 채운 것 뿐입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복음을 전하는 것입니다. ‘복음’이라는 것이 마치 하나의 단어처럼 묘사되어서 이해하기 쉽지 않은 것이 사실입니다.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기쁘게 살도록 도와주는 것, 진정으로 행복하게 도와주는 것’을 의미합니다.
기쁨이라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재미난 코메디 프로를 보면 기쁠까요? 백화점에서 1억원치를 쇼핑하면 기쁜 것일까요? 아닙니다. 그러한 것은 참된 기쁨이 될 수 없습니다. 그러한 것들은 일시적인 것이고 스쳐 지나가는 것입니다. 진정한 기쁨은 나의 내면의 깊은 곳으로부터 우러나와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기쁠 수 있는 이유는 기쁨의 근원이신 분에게 가까이 머무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사랑하고 사랑 받기에 기쁜 것이지요. 헌데 오늘날 사람들은 바로 이 점을 상실해 가고 있기 때문에 다른 데에서 기쁨을 찾으려는 것이고 결국 그들이 구할 수 있는 기쁨은 ‘쾌락’에 불과합니다. 물을 마셔야 목마름이 해소가 되는데 물은 마시지 않고 자꾸 탄산음료를 마셔서 건강은 건강대로 상하고 목도 금새 다시 마르는 일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하느님에게서 우러나오는 참된 기쁨을 사람들에게 전하는 것, 그것이 복음을 전하는 일입니다. 하지만 이 일은 단순히 입으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사람들은 입에서 나오는 말을 듣기 전에 그를 바라봅니다. 그의 삶을 바라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가 말하는 것을 그가 살지 않으면 ‘신뢰’를 상실하고 맙니다. 복음을 전하는 이는 복음을 살아야 합니다. 말씀의 기쁨을 전하는 이는 말씀의 기쁨을 살아야 하지요.
하지만 그 말씀은 십자가에 못박혔습니다. 그것으로 사람들을 사랑한 셈이지요. 그렇다면 우리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단순히 말로 서로 사랑하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뛰어 들어야 합니다. 다가서도 실패도 겪고 다시 다가서서 결국 사랑을 이루어내는 것이지요. 우리는 그렇게 사랑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우리가 모두 서로 사랑한다면 사랑은 그리 어렵지 않겠지만 이 지상에서 사랑하는 것은 ‘사랑하지 않으려는 이들’을 넘어서서 사랑을 이루어야 하기 때문에 사랑은 쉽지 않습니다. 하지만 사랑은 그만한 가치가 있습니다. 고난을 겪어야 그 결과가 의미가 있는 것처럼 시련을 겪어야 사랑도 그 빛을 발하게 되는 것입니다. 우리는 복음을 전해야 하고, 사람들에게 기쁨을 전해야 하며, 그것을 위해서 십자가를 지고 사랑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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