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심고 아폴로는 물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자라게 하신 분은 하느님이십니다. 그러니 심는 이나 물을 주는 이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오로지 자라게 하시는 하느님만이 중요합니다. (1코린 3,6-7)
무엇을 심고 어떤 물을 주고 무엇을 자라게 하는 것인가? 이는 참으로 중요한 주제입니다. 왜냐하면 수많은 이들이 이를 착각하기 때문입니다.
한때 한국 교회에 ‘숫자 놀이’가 유행한 적이 있었습니다. 예비자 숫자, 냉담자 회두 숫자, 교세 통계 등등이 우리가 하는 일의 중요한 척도를 차지했지요. 특히나 군대는 선교의 황금어장이라고까지 불리기도 했습니다. 수많은 세례자를 배출한다는 명목이었지요.
그러나 오늘날 이런 의견들은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과연 그런 숫자들이 진정한 의미를 지니는지 되살펴보게 되었지요. 우리가 진정 전해주려고 하는 것이 무엇인지 되생각해 보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신앙을 전해야 합니다. 이 신앙이라는 것은 사고 팔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니지요. 얻고 잃을 수 있는 무언가가 아닌 것입니다. 사람에게서 뼈를 순식간에 뽑아낼 수는 없는 노릇입니다. 뼈는 날 때부터 존재해서 서서히 굳어가고 성장해 가는 것이지요. 신앙도 마찬가지입니다. 이미 우리 안에 있는 것을 어떻게 키워 나가고 성장시켜 나가는가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그 뼈가 단숨에 사라지거나 없던 뼈가 일순간에 생겨나는 일은 없습니다.
신앙의 씨앗은 참으로 작습니다. 아주 작은 깨달음, 아주 작은 전교의 행위가 그 씨앗을 전해줄 수 있습니다. 그리고 거기에 물을 주는 이들이 존재하지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열심히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런 노력 끝에 씨앗이 싹이 트고 자라나게 되는 것입니다. 하지만 그 구체적인 과정은 하느님에게 달려 있습니다.
누군가는 이런 말을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씨앗을 심은 사람이 있으니 씨앗이 자라는 것 아닌가? 씨앗을 심은 사람은 마땅히 중요한 사람이 틀림없다.’라고 말이지요. 아닙니다. 만일 우리가 씨앗을 심기를 거부한다면 하느님은 그 역할에 합당한 다른 누군가를 반드시 찾아내실 것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얻게 된 직분을 감사히 여길 줄 알아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가 잘나서 지금 하는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물을 주는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실 씨앗도 물도 모두 하느님께서 마련해 주시는 것입니다. 물을 주는 사람은 이미 존재하는 물을 퍼나르는 것 뿐이지요. 그래서 봉사하는 이들은 하느님 앞에서 겸손해야 합니다. ‘우리는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입니다.’라고 고백할 줄 알아야 합니다.
중요한 것은 하느님입니다. 하느님의 힙을 입어 우리에게는 모든 것이 가능하니까요. 절대로 교만하거나 자만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행여 좋은 것이 있다면 그 모든 것은 하느님에게서 나온 것일 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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