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위를 향한 만남입니다. 이런 상상을 해 봅시다. 한 무리의 군중이 수도원을 방문을 갑니다. 그러면 그 수도원의 영성이 그들에게 전해질까요? 조용히 기도하는 수녀님들을 보면 ‘분위기’를 느낄 순 있지만 우리가 딱히 달라질 건 없습니다. 그저 눈구경을 하러 가는 셈이지요.
많은 이들이 평면적 접근을 하면서 뭔가 들어높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지요. 아주 한적한 곳에 가서 좋은 말을 듣고 오면 뭔가 달라진다고 믿지만 이내 예전의 삶이 다시 반복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루살렘을 찾아가고 순교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면과 삶이 일치되는 지점을 찾아서 나아가야 합니다. 순교자의 유해를 몸에 아무리 지니고 있어도 우리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명칭을 얻는다 하더라도 내 이웃 하나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언급하는 모습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화려함과 거룩함을 찾아서 전 세계를 순방하지만 실상 위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나의 미천한 영성을 더욱 아래로 굳힐 뿐입니다.
화가 날 상황에서 인내를 발휘하는 것이 수도원을 1000번 방문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남는 것을 가난한 이를 위해서 내어주는 것이 순교자의 후손의 이름을 얻는 것보다 더 순교적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는 걸까요?
많은 이들이 평면적 접근을 하면서 뭔가 들어높여지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렇게 믿지요. 아주 한적한 곳에 가서 좋은 말을 듣고 오면 뭔가 달라진다고 믿지만 이내 예전의 삶이 다시 반복되곤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위’를 향해서 나아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아무리 예루살렘을 찾아가고 순교자들의 무덤을 방문한다고 하더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내면과 삶이 일치되는 지점을 찾아서 나아가야 합니다. 순교자의 유해를 몸에 아무리 지니고 있어도 우리가 순교자가 되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입니다. 순교자의 후손이라는 명칭을 얻는다 하더라도 내 이웃 하나 용서하지 못하는 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실 제가 언급하는 모습들은 주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모습들입니다. 우리는 외적인 화려함과 거룩함을 찾아서 전 세계를 순방하지만 실상 위로는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하는 셈입니다. 아니, 오히려 반대로 나의 미천한 영성을 더욱 아래로 굳힐 뿐입니다.
화가 날 상황에서 인내를 발휘하는 것이 수도원을 1000번 방문하는 것보다 나을지도 모릅니다. 나에게 남는 것을 가난한 이를 위해서 내어주는 것이 순교자의 후손의 이름을 얻는 것보다 더 순교적일지 모릅니다. 우리는 어디를 향해서 나아가는 걸까요?
댓글
하찮게 보는 우리틀의 삶속에 숨어있는
그 어느 보석보다 진귀한 인간의 가치이다.
하찮게 보는 우리틀의 삶속에 숨어있는
그 어느 보석보다 진귀한 인간의 가치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