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공허함 또는 허무함을 느끼는 이유는 뭘까요? 채워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채워져야 할 것을 채우지 않고 전혀 엉뚱한 것을 채우려고 들기 때문입니다.
목이 마른데 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밥이 맛있다면 잠시 목마름을 잊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목이 마른 건 목이 마른 것이지요. 밥을 먹는 동안에는 잊을 수 있어도 결국 목을 축이지 않으면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허를 느끼는 것은 육적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적 공허는 세상적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헌데 우리는 공허를 느끼기 시작하면 세상 안에서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여러가지 욕구들을 채우면서 그 공허를 메꾸려 하지요. 하지만 그 공허는 메꾸어지지 않고 도리어 갈증을 더하는 셈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영적 공허를 채울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신앙의 선배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하느님도 보이지 않고 그분의 뜻은 더더욱이 그런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이런 사람들 앞에서 두 가지만 청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아주 단순하고도 가장 중요한 원리이지요. 첫째는 ‘온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것만 잊지 않으면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질문을 받으면 또 자기들 상황을 해석해 달라고 징징댈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런데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느냐? 내가 아는 사람이 이런 억울한 일을 했는데 그를 어찌 사랑하느냐? 라고 따지고 묻지요. 즉 사람들은 ‘메뉴얼’을 찾습니다. 모든 순간과 상황이 적힌 메뉴얼을 찾는 거지요. 마치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처럼 A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을, B의 경우에는 저런 방법을 찾습니다.
그런 게 있을리가 없지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우리의 삶은 유기체입니다. 역동적이고 변화하지요. 우리는 근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밖에 없는 셈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가? 나는 과연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가?
많이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질문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삶은 살기 위해 있는 것이지 ‘사색’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목이 마른데 된 밥을 먹는다고 생각해 봅시다. 밥이 맛있다면 잠시 목마름을 잊을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목이 마른 건 목이 마른 것이지요. 밥을 먹는 동안에는 잊을 수 있어도 결국 목을 축이지 않으면 목마름은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공허를 느끼는 것은 육적인 것으로 채울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그리고 영적 공허는 세상적 기쁨으로 채울 수 있는 것이 아니지요. 헌데 우리는 공허를 느끼기 시작하면 세상 안에서 그것을 채우려고 합니다. 여러가지 욕구들을 채우면서 그 공허를 메꾸려 하지요. 하지만 그 공허는 메꾸어지지 않고 도리어 갈증을 더하는 셈입니다.
오직 하느님만이 우리의 영적 공허를 채울 수 있는 분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한단 말입니까? 신앙의 선배들은 하느님의 뜻을 찾으라고 조언합니다. 하느님도 보이지 않고 그분의 뜻은 더더욱이 그런데 과연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할까요?
저는 이런 사람들 앞에서 두 가지만 청합니다. 이미 예수님이 가르쳐 주신 아주 단순하고도 가장 중요한 원리이지요. 첫째는 ‘온 힘을 다해서’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둘째는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는 것이지요. 이것만 잊지 않으면 크게 엇나가지 않습니다.
물론 사람들은 이 질문을 받으면 또 자기들 상황을 해석해 달라고 징징댈 것입니다. 나는 지금 이런데 어떻게 하느님을 사랑하느냐? 내가 아는 사람이 이런 억울한 일을 했는데 그를 어찌 사랑하느냐? 라고 따지고 묻지요. 즉 사람들은 ‘메뉴얼’을 찾습니다. 모든 순간과 상황이 적힌 메뉴얼을 찾는 거지요. 마치 전자제품 사용 설명서처럼 A의 경우에는 이런 방법을, B의 경우에는 저런 방법을 찾습니다.
그런 게 있을리가 없지요. 우리는 기계가 아니니까요. 우리의 삶은 유기체입니다. 역동적이고 변화하지요. 우리는 근본 질문을 스스로에게 던질 수 밖에 없는 셈입니다. 나는 하느님을 온 힘을 다해 사랑하는가? 나는 과연 이웃을 내 몸처럼 생각하는가?
많이 질문해 보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질문만 하고 있어서는 아무것도 되지 않는다는 것도 잊지 마십시오. 삶은 살기 위해 있는 것이지 ‘사색’만 하라고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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