뚜렷한 두 노선이 존재합니다.
나 중심 / 하느님 중심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이는 ‘나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위한 젖을 찾지 다른 아이가 먼저 먹을 때까지 양보하고나서 그 다음에 나를 위한 젖을 달라고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빽빽거리면서 울어서 젖을 얻었고, 변을 보고 뒤가 찝질해도 울고, 아프다고 울고, 심심하다고 울고 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얻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셈이지요.
이렇게 ‘나’라는 존재가 가장 중심에 머물러 있는 우주관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내 안의 양심과 타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혀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시작하셨지요. 얼마든지 내 멋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하면 가슴이 아픈 이유는 양심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아이가 아무리 두드려 맞아도 내가 아픈 건 아닌데 내가 상대의 아픔을 짐작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관계’ 안에서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우주에서 벗어나 범위를 넓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작용들 속에서 여전히 ‘나의 우주’만을 넓히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지독히 ‘이기적’인 사고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사람은 사물을 소유하고 관계를 소유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지요. 이들에게는 진정한 친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관계’라는 것은 ‘계약’에 불과합니다. 즉 내가 필요할 때에는 좋아하다가 언제라도 그 필요가 상실되면 내버리는 것이 이들의 관계일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들은 더욱더 자신 안으로 모여드는 응집력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혀 버리고 결국 그 세계가 ‘지옥’으로 변하는 체험을 하게 되지요.
반대로 하느님에게로 영역을 넓히는 이들은 자신 안으로 모아들이는 힘을 조금씩 상실해 갑니다. 이들은 ‘나의 것’이라는 의미를 점점 잃어 갑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들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그것을 잠시 빌린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육신도, 외모도, 재화도, 위신도, 권력도…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쓰라고 내어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잃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셨다가 다시 돌려 받으시는 것일 뿐입니다.
이들의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뜻이 있는 곳이면 광야라도 달려가고, 반대로 하느님의 뜻이 없으면 가장 화려하고 안락한 자리라도 마다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조화를 찾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그 자체로 ‘천국’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도 이들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중심의 변화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가 솜사탕을 얻듯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그 안에 자유의지로 동참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나 중심 / 하느님 중심
사실 세상의 거의 모든 이는 ‘나 중심’으로 편향되어 있다고 봐도 무방합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나를 위한 젖을 찾지 다른 아이가 먼저 먹을 때까지 양보하고나서 그 다음에 나를 위한 젖을 달라고 울어본 적이 없습니다. 배가 고프면 빽빽거리면서 울어서 젖을 얻었고, 변을 보고 뒤가 찝질해도 울고, 아프다고 울고, 심심하다고 울고 하면서 부모의 사랑을 얻는 데에 익숙해져 버린 셈이지요.
이렇게 ‘나’라는 존재가 가장 중심에 머물러 있는 우주관에서 하느님의 손길이 시작됩니다. 하느님은 내 안의 양심과 타인을 통해서 우리에게 전혀 다른 우주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리기 시작하셨지요. 얼마든지 내 멋대로 해도 될 것 같은데 거짓말을 하면 가슴이 아픈 이유는 양심이 있기 때문이고, 다른 아이가 아무리 두드려 맞아도 내가 아픈 건 아닌데 내가 상대의 아픔을 짐작하는 것도 하느님께서 ‘관계’ 안에서 우리가 당신을 찾도록 하기 위한 배려이셨습니다.
그렇게 우리는 우리의 우주에서 벗어나 범위를 넓히기 시작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러한 여러가지 작용들 속에서 여전히 ‘나의 우주’만을 넓히려는 시도도 있습니다. 지독히 ‘이기적’인 사고가 시작되는 것이지요. 이 사람은 사물을 소유하고 관계를 소유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모든 것을 ‘자기 중심’으로 해석하지요. 이들에게는 진정한 친구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들에게 ‘관계’라는 것은 ‘계약’에 불과합니다. 즉 내가 필요할 때에는 좋아하다가 언제라도 그 필요가 상실되면 내버리는 것이 이들의 관계일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의 영역을 무한히 확장시키려 하지만, 오히려 정반대입니다. 이들은 더욱더 자신 안으로 모여드는 응집력을 증가시킬 뿐입니다. 이들은 자신만의 세계 안에 갇혀 버리고 결국 그 세계가 ‘지옥’으로 변하는 체험을 하게 되지요.
반대로 하느님에게로 영역을 넓히는 이들은 자신 안으로 모아들이는 힘을 조금씩 상실해 갑니다. 이들은 ‘나의 것’이라는 의미를 점점 잃어 갑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의 것이고 우리들은 이 땅에 머무는 동안 그것을 잠시 빌린 것일 뿐입니다. 우리의 육신도, 외모도, 재화도, 위신도, 권력도… 모든 것은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쓰라고 내어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잘 인지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들은 잃을 것이 없습니다. 모든 것은 하느님이 주셨다가 다시 돌려 받으시는 것일 뿐입니다.
이들의 유일한 일은 하느님의 뜻을 이루는 것입니다. 이들은 하느님의 뜻이 있는 곳이면 광야라도 달려가고, 반대로 하느님의 뜻이 없으면 가장 화려하고 안락한 자리라도 마다합니다. 모든 것의 중심에 하느님을 두고 생각하고 그 안에서 조화를 찾습니다. 그렇기에 이들은 그 자체로 ‘천국’을 살아갑니다. 왜냐하면 천국이라는 것은 하느님의 뜻이 온전하게 이루어지는 나라이기 때문입니다. 죽음의 공포도 이들을 사로잡지 못합니다. 이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이미 새로운 생명을 얻었기 때문이지요.
중심의 변화가 바로 우리의 구원입니다. 구원이라는 것은 어린 아이가 솜사탕을 얻듯이 돈을 주고 사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미 존재하는 그 안에 자유의지로 동참하는 것으로 이루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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