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러분이 서로 고소한다는 것부터가 이미 그릇된 일입니다. 왜 차라리 불의를 그냥 받아들이지 않습니까? 왜 차라리 그냥 속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도리어 스스로 불의를 저지르고 또 속입니다. 그것도 형제들을 말입니다. (1코린 6,7-8)
불의 앞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를 감싸안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는 올바른 정의를 실천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불의 앞에서 올바른 시선을 지닌 이에게 문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분별하여 알려주는 대로 ‘순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위에 적힌 성경 구절대로 오히려 그냥 불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알면서 속아 주는 것이지요. 이들은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사랑은 참으로 큰 것이지요. 마치 어린 자녀들이 떼를 쓰는 것을 넓은 품으로 받아들여 잠잠하게 만들듯이 세상의 불의를 감싸 안아 진정시키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의 크기는 짐작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두 태도는 커녕 서로를 고자질하고, 서로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스스로를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억울하다고 세상 법정에 송사를 걸어서 상대를 씹어 삼키려 하고, 가능하다면 속여서라도 상대를 무너뜨리려고 하면서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은 그 행실로 판단하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이 우리 스스로를 심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지요.
불의 앞에는 두 가지 태도가 있을 수 있습니다. 하나는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불의를 감싸안는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바오로 사도는 먼저는 올바른 정의를 실천하는 법을 알려줍니다. 그것은 불의 앞에서 올바른 시선을 지닌 이에게 문의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가 분별하여 알려주는 대로 ‘순명’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정의를 실천하는 길입니다.
다른 하나는 위에 적힌 성경 구절대로 오히려 그냥 불의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알면서 속아 주는 것이지요. 이들은 ‘악을 자신 안에서 녹여내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사랑은 참으로 큰 것이지요. 마치 어린 자녀들이 떼를 쓰는 것을 넓은 품으로 받아들여 잠잠하게 만들듯이 세상의 불의를 감싸 안아 진정시키는 이들입니다. 이들의 마음의 크기는 짐작하기 힘들 정도입니다.
하지만 이런 두 태도는 커녕 서로를 고자질하고, 서로에게 불의를 저지르는 이들이 있으니 그들은 스스로를 신앙인이라고 생각합니다. 이 얼마나 큰 착각인지 모르겠습니다. 억울하다고 세상 법정에 송사를 걸어서 상대를 씹어 삼키려 하고, 가능하다면 속여서라도 상대를 무너뜨리려고 하면서 스스로는 의롭다고 생각하고 있으니 엄청난 착각이 아닐 수 없습니다.
하느님은 모든 이들은 그 행실로 판단하시게 될 것입니다. 결국 우리가 지금 하는 행동이 우리 스스로를 심판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셈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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