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치 않는 아이에게 억지로 먹이려는 것보다 배고픈 아이에게 주는 것이 훨씬 낫습니다. 이는 영적인 상황에서도 고스란히 적용이 됩니다. 사람들이 모두 같은 마음인 것은 아닙니다. 스펀지처럼 빨아들이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자신의 교만의 탑에 갇혀서 방어에 몰두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받아들이려는 사람만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 것일까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이런 고민은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가지지도 못했고, 가져도 내어줄 생각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 즉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이라는 보물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자면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을 내면에 간직한 이들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과연 모든 신앙인들이 ‘신앙’ 때문에 신앙인이 되는 걸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신앙생활’에 참여하는 것일 뿐일까요? 이는 각자가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장사를 위한 인맥을 얻기 위해서, 대학생으로서 딱히 다른 친교활동이 없어서, 청년이 결혼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서… 정말 수도없이 많은 이유들, 즉 핵심에 신앙이 아닌 다른 이유들이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합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보물을 맛보지 못한 신앙인들이 많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맛보기 싫어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그들의 눈에는 고통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생활은 ‘최소’를 찾아 나섭니다. 즉 최소한의 것만을 이루는 신앙생활을 하지요.
주일미사를 나오는 것이 법이라 하니, ‘최소한’ 그것은 지키고, 재의 수요일에 단식을 하라고 하니 ‘최소한’ 그것은 지킵니다. 다행히 가톨릭 교회에는 십일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하니 ‘최소한’의 교무금으로 의무를 다하려고 할 뿐, 그 안에는 신앙의 기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지지 못하니 내어주지 못합니다. 신앙의 기쁨이 없으니 기쁨을 전할 수 없고 그래서 신앙을 나눈다, 신앙을 내어준다는 의미를 전혀 공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아이는 억지로 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은 배고픈 아이에게 주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아이가 배가 고프지 않은 걸까요? 아니면 배가 고픈데 전혀 다른 욕구에 중독되어 있어서 배고픔을 잊은 채로 음식을 거부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이 뚜렷해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들의 ‘중독’을 드러내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이끌 수 있을까요?
그렇다면 우리는 받아들이려는 사람만 찾아 돌아다녀야 하는 것일까요? 받아들이지 않으려는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요? 사실 이런 고민은 거의 아무도 하지 않는 고민입니다. 왜냐하면 가지지도 못했고, 가져도 내어줄 생각도 없기 때문입니다.
이게 무슨 뜻일까요?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의 의미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그리스도인, 즉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이라는 보물을 지닌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다시 강조해서 말하자면 신앙인이 된다는 것은 ‘신앙’을 내면에 간직한 이들이어야 한다는 말이지요. 하지만 과연 모든 신앙인들이 ‘신앙’ 때문에 신앙인이 되는 걸까요? 아니면 전혀 다른 이유와 목적으로 ‘신앙생활’에 참여하는 것일 뿐일까요? 이는 각자가 스스로에게 해야 하는 질문입니다.
장사를 위한 인맥을 얻기 위해서, 대학생으로서 딱히 다른 친교활동이 없어서, 청년이 결혼 배우자를 구하기 위해서… 정말 수도없이 많은 이유들, 즉 핵심에 신앙이 아닌 다른 이유들이 존재할 수 있고 실제로 존재합니다. 모두가 같은 마음으로 신앙생활에 동참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래서 ‘신앙’이라는 보물을 맛보지 못한 신앙인들이 많고, 더 엄밀히 말하자면 맛보기 싫어하는 신앙인들이 많습니다. 왜냐하면 신앙이라는 것은 그들의 눈에는 고통스럽고 거추장스러운 것으로 비춰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들의 신앙생활은 ‘최소’를 찾아 나섭니다. 즉 최소한의 것만을 이루는 신앙생활을 하지요.
주일미사를 나오는 것이 법이라 하니, ‘최소한’ 그것은 지키고, 재의 수요일에 단식을 하라고 하니 ‘최소한’ 그것은 지킵니다. 다행히 가톨릭 교회에는 십일조를 강요하지는 않는다고 하니 ‘최소한’의 교무금으로 의무를 다하려고 할 뿐, 그 안에는 신앙의 기쁨이 존재하지 않습니다.
가지지 못하니 내어주지 못합니다. 신앙의 기쁨이 없으니 기쁨을 전할 수 없고 그래서 신앙을 나눈다, 신앙을 내어준다는 의미를 전혀 공감하지도 못하는 것입니다.
원치 않는 아이는 억지로 먹일 필요가 없습니다. 음식은 배고픈 아이에게 주는 것이 맞습니다. 하지만 원치 않는 아이가 배가 고프지 않은 걸까요? 아니면 배가 고픈데 전혀 다른 욕구에 중독되어 있어서 배고픔을 잊은 채로 음식을 거부하는 걸까요? 그렇다면 우리가 먼저 선행해야 할 일이 뚜렷해지게 됩니다. 그들에게 현실을 보여주는 것이지요. 그들의 ‘중독’을 드러내어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소경이 소경을 이끌 수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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