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택이라는 것은 자유로움을 전제로 합니다. 자유롭지 않은 상태에서 하는 선택은 사실 선택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가장 자유로운 상태가 되도록 해야 하고, 그 안에서 올바른 선택을 할 수 있도록 해야 합니다.
우리의 선택을 가로막는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핵심은 우리의 어두움입니다. 이를 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두워진 상태로 선택하기에 많은 선택을 그릇되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빛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가장 근본에는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방향을 잡아 나가지요. 그리고 그 방향에 따라서 우리의 전체적인 움직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온갖 역경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는 빛을 향해서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가지 방해를 겪겠지만 이 아이의 근본 선택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결국은 원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역경 속에서 내면의 근본 선택을 포기해 버리는 아이(포기를 선택하는 아이)는 결국 그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더욱 깊은 늪에 빠져 버리게 되지요.
우리 주변에 다가오는 시련과 역경이라는 것들은 결국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의 선택을 강화하는 도구이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가장 근본을 모두 똑같이 존엄하게 만드셨고 그 누구도 다른 이의 핑계를 댈 수는 없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필요한 선택의 길이 활짝 열려있게 마련이지요.
기름 한 방울을 물 속에 넣고 아무리 뒤흔들어도 결국 그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기름통에 물을 한 방울 넣으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지요. 우리가 처음부터 기름과 물로 선택되어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름이 되거나 물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근본의 흐름은 우리의 고유한 ‘자유’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선택을 가로막는 수많은 것들이 있지만 그 가운데 핵심은 우리의 어두움입니다. 이를 죄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우리는 어두워진 상태로 선택하기에 많은 선택을 그릇되이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아무런 잘못이 없다는 뜻일까요? 아닙니다. 우리는 빛을 구할 수 있는 능력을 지니고 있기 때문이지요.
우리의 가장 근본에는 그 무엇도 침범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합니다. 우리는 바로 거기에서부터 방향을 잡아 나가지요. 그리고 그 방향에 따라서 우리의 전체적인 움직임도 달라지는 것입니다.
온갖 역경과 시련에도 불구하고 한 아이는 빛을 향해서 손을 뻗을 수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가지 방해를 겪겠지만 이 아이의 근본 선택은 변함이 없을 것이고 결국은 원하는 것을 얻게 됩니다. 하지만 자신에게 다가오는 시련과 역경 속에서 내면의 근본 선택을 포기해 버리는 아이(포기를 선택하는 아이)는 결국 그 시련과 역경을 통해서 더욱 깊은 늪에 빠져 버리게 되지요.
우리 주변에 다가오는 시련과 역경이라는 것들은 결국 ‘도구’일 뿐입니다. 우리의 선택을 강화하는 도구이지요. 하느님은 인간의 가장 근본을 모두 똑같이 존엄하게 만드셨고 그 누구도 다른 이의 핑계를 댈 수는 없습니다. 저마다의 자리에서 필요한 선택의 길이 활짝 열려있게 마련이지요.
기름 한 방울을 물 속에 넣고 아무리 뒤흔들어도 결국 그 기름은 물 위로 떠오르게 마련입니다. 반대로 기름통에 물을 한 방울 넣으면 밑으로 밑으로 가라앉지요. 우리가 처음부터 기름과 물로 선택되어져 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기름이 되거나 물이 되기를 선택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그 근본의 흐름은 우리의 고유한 ‘자유’에 의해서 바뀔 수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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