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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미사 강론

어제는 반미사가 있었습니다. 매주 수요일마다 하는 성경 강의에서 참석자들에게 일단 여러분들이 모임을 주선하면 제가 가서 미사를 드리겠다고 했더니 용기있는 신앙인들이 모임을 만들었습니다. 그래서 가서 미사를 드렸습니다.

전등 불빛은 희미하고 먼지 바람이 풀풀 날려서 성작 위의 성체포가 두번이나 날려 흙바닥에 떨어지고 개들은 제대로 마련해 놓은 책상 주변에 서성이고 엄마들은 아이들 젖 먹이고, 애는 껌을 질근질근 씹으면서 미사에 참석한답시고 나와 있었지만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람들에겐 오늘이 하느님의 메세지를 들을 수 있는 어쩌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수 있는 기회니까요. 그래서 힘을 내어 강론을 시작했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존엄성이 어디서 나온다고 생각하십니까? 사람이 많은 돈을 벌고 좋은 대학에 들어가면 존엄하고 그렇지 않으면 존엄성이 사라지는걸까요? 사람의 존엄성은 우리가 외적으로 소유할 수 있는 것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머릿 속에 가득 든 지식으로 얻을 수 있는 게 아닙니다. 인간의 존엄은 하느님의 자녀라는 데에서 시작됩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이기 때문에 그 존엄성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은 모두 중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고 모든 인간에게는 같은 목적지가 있지요. 그것은 바로 이 생이 다하고 나면 영원한 생명으로, 즉 구원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의 삶은 아무런 의미가 없어지고 맙니다. 세상 안에서 아무리 돈을 많이 벌고, 아무리 좋은 직장을 구해도 그러한 것들이 인간의 존엄을 만들지는 못합니다.

인간 존재라는 것은 바로 하느님의 자녀라는 존엄성 때문에 의미가 생기는 것이지요. 그러면 어떻게 하면 하느님의 뜻을 따를 수 있을까요?

사실 하느님은 이미 여러분들을 사랑하고 계십니다. 문제는 우리가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는다는 데에 있지요.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습니다. 그것이 문제인 것입니다. 예컨대 물에 빠져들어가는 사람이 있는데 도와주려고 아무리 손을 내밀어도 물에 빠지는 사람이 살아날 의욕이 없으면 어쩔 수 없는 셈입니다.

여러분에게 하느님은 이미 손을 내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미사가 그 증거이지요. 그리고 여러분들을 위해서 일하려는 교리교사도 그 증거이지요. 하느님은 이미 여러분을 위해 이런 저런 사인들을 보내고 계신 것이지요. 하지만 문제는 우리들이 의욕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과연 의욕이 없을까요? 여러분들은 과연 일하는 시간 외에는 너무나 지쳐서 다른 그 어떤 활동도 하지 않고 계신가요? 아닙니다. 여러분들은 하고 싶은 걸 하고 살아갑니다. 텔레비전도 보고 라디오도 듣지요. 하지만 성당과 관련해서는 그 어떤 것도 하기 싫어하는 것입니다.

그러는 동안 여러분들은 내적인 ‘가치’들을 상실해 갑니다. 자신이 가지고 있지 않으니 자녀들에게 줄 수도 없지요. 그래서 자녀들은 가치 없이 성장해 갑니다. 그리고 악순환이 반복되는 것이지요. 술에 쩔어 집에 들어와 가정 폭력을 일삼는 부모 밑에서 자란 자녀들은 충분히 받지 못한 사랑 때문에 다시 같은 폭력을 일삼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게 돌고 도는 것이지요. 이 흐름을 끊어야 하는데, 누군가가 일을 시작해야 하지요. 그래서 제가 여기와서 일하고 있는 이유입니다.

저는 일을 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문제는 여러분들입니다. 여러분들은 과연 원하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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