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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느님의 시선

가난해도 존엄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해도 미천한 사람이 있습니다. 가난해도 존엄한 사람은 내면의 가치를 잃어버리지 않은 사람입니다. 부유해도 미천한 사람은 겉만 번지르르하고 내면을 상실한 사람입니다.

비록 노가다로 일하더라도 늘 성실하고 책임을 다하고 신앙 안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부유하면서 게으르고 무책임하고 거짓과 기만과 허영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사람들은 많은 경우 자신의 본모습을 올바로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을 비춰볼 거울이 없기 때문이지요. 스스로 자신을 아무리 바라보아야 필터에 걸러진 모습들 뿐입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아무리 잘나 보여도 스스로 못나게 생각할 수 있고, 반대로 남들이 보기에는 정말 이상하고 엉뚱한데도 스스로는 잘난 사람이라고 착각하고 살기도 하지요.

우리가 우리를 비춰볼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은 하느님의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하느님의 시선을 배워야 합니다. 하느님이 세상을 바라보는 방법을 배우고 그 시선으로 우리 스스로를 바라보면 됩니다. 그때에는 우리가 외적으로 가진 것, 우리가 소유한 것들은 그 의미를 상실하고 우리 내면의 빛이 드러나게 됩니다.

그 빛이 밝은 사람은 그 밝은 빛으로 다른 것들을 비춥니다. 반대로 그 빛이 어두운 사람은 그 어두운 빛으로 다른 것들을 비춥니다. 밝은 빛은 더욱 밝은 빛을 찾아 끌어들이고, 반대로 어두운 빛은 어두움으로 내리달려갑니다.

배워야 할 사람이 스스로 안다고 생각하고, 정작 아는 사람은 겸손합니다. 훗날 우리가 영원으로 건너갔을 때에 참으로 재미난 사실들을 많이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우리가 들어높였던 이들이 수렁에 빠져 있고, 반대로 우리가 천대했던 이들이 높은 자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을 보게 되는 날, 과연 우리의 마음은 어떨런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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