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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행한 이들

자신 안에 행복이 없는 사람들은 타인들의 행복을 견뎌내지 못합니다. 마치 큰 돌을 들어올리면 그 안에 숨어있던 벌레들이 다시 햇빛을 피하고 어둠을 찾아 들어가는 것과 같이 스스로 불행을 조장하는 자들은 행복이 다가와도 피해 버리고 마는 셈이지요. 그래서 이들은 행복한 이들을 보면 조롱하고 싶어하고 그의 행복을 파괴하고 싶어합니다.

해결책이라고 한다면 스스로의 행복을 가꾸어 나가는 것이 되어야 하는데 이들은 타인의 행복을 파괴하면서 대리만족을 느낍니다. 저들이 더욱 불행하니 나의 불행은 그나마 행복이라고 자위하는 것이지요. 참으로 어리석은 행복의 법칙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들의 특징은 꼬투리잡기입니다. 말 하나, 행동 하나에 모두 꼬투리를 잡고 늘어집니다. 그래서 현명한 사람은 그들 앞에서 말과 행동을 삼가합니다. 왜냐하면 모든 선의와 진실마저도 그들 앞에서는 비난거리가 되기 때문입니다. 돼지에게는 진주를 던지지 않는 법이지요.

타인이 행복할 때에 그 행복을 축하하고 함께 기뻐해 줄 수 있는 마음이 중요합니다. 그 행동 자체로 우리는 그와 일치해 있다는 것을 반증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불행한 자들의 또다른 특징은 시기입니다. 이들은 다른 이들의 좋은 것들을 시샘하느라 거의 모든 시간을 보냅니다. 자신 안에 그런 역량을 개발할 여유를 갖지는 못한 채로 타인의 장점을 파괴하려고 드는 이들이지요.

뭔가 좋은 글이나 그림을 보고도 99%의 아름다움 구석에 있는 1%의 흠을 찾아내는 이들입니다. 그러니 그들 마음은 이미 짐작할 만 하지요.

그래서 이들을 대할 때에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스스로 깨달을 수 있도록 여러가지 것들을 둘러서 말해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쉽지는 않을 것입니다. 왜냐면 깨달을 마음이 있었다면 진작에 깨달아서 빛을 향해서 나아갈 것이기 때문이지요. 이들은 깨닫고자 하는 마음을 진작에 저버린 이들입니다.

댓글

임혜경 브리짓다님의 메시지…
신부님
제가 쓰는 이글이 신부님께 가나요?
임혜경 브리짓다님의 메시지…
신부님께 여쭤봐도 될까요?
신부님글을 읽으며 지혜로우신 답도 주실것같아
서...그러나 카톡에 올리기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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