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성에 관해서 오늘 저녁에 공소 축제 9일 기도에 가서 가르치기로 했습니다. 과연 무엇을 가르쳐야 할까요? 대충 흐름을 잡아볼까 합니다.
영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동물들이 살 듯이 살지 못합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서 충실히 생활합니다. 먹고 자고 하지요. 기분이 좋을 땐 좋고 나쁘면 나쁘고 그렇게 보다 단순한 삶의 패턴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미묘한 존재입니다. 마치 내면에 엄청난 공간이 있어서 모든 기억이 저장되고 우리가 원할 때면 그 기억을 고스란히 되꺼내어 재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분 좋은 시기라도 내면의 공간에서 과거의 어두움을 꺼내면 고스란히 그 어두움에 사로잡히고, 반대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과거의 행복함을 되새기면 거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 영역(실제로는 ‘내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내면을 아무리 해부해보아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적 차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듯 싶습니다.)이 바로 우리 영이 지니는 일부의 기능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은 단순히 이 기능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방대하고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바로 이 내면의 영역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 이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가능성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다 온전히 열려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 영역을 감추고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활짝 열고 살 수도 있습니다.
영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 영의 막대한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한 하나의 활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성들이 존재합니다. 여러가지 차원에서 인간을 조명하는 것이지요. 뭐든 이름만 붙이면 다 영성이 되는 셈입니다. 생태계 영성, 진리의 영성, 몸의 영성… 심지어는 쓰레기 영성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 빗대어 내면을 관찰하고 내면의 영역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여러가지 혼잡스러움을 넘어서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영성은 ‘하느님’으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영성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습니다. 언급한다고 해도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지요. 모든 영성의 근본은 하느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믿는 대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의 영역의 확장은 어딘가로 국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운동선수 가운데 수영을 잘하는 선수와 농구를 잘하는 선수의 종목이 다르지만 인간의 육체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서 하나는 지느러미를 갖고 있고 다른 하나는 캥거루의 다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모든 인간의 영의 가능성은 모든 것에로 열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보다 뛰어난 기능을 드러내는 것을 ‘카리스마’로 정의할 뿐이지요.
영성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에게로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라는 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처럼 복잡 다단한 것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신 분이 아닙니다. 뭔가 음흉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느님은 오직 하나만을 가르쳐 오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지요. 결국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은 영성을 완성시켜가는 사람입니다.
영성의 복잡성은 인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 인간이 단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살라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개의 우주를 만들어 버리지요. 즉 우리 인간의 고유한 이기심이 이 영성을 지독하게도 복잡 다단하게 만들어 버리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했다가 또 저것을 원했다가 하느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가 또 반대로 돌아서서 달아나 버리기를 곧잘 합니다. 그러니 참으로 단순한 영성의 길이 각 사람에 따라서 그 복잡함을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요? 각자에게 적합한 영성을 연구해서 매번 논문으로 쏟아내어야 하는 걸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보다 단순한 중심으로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시고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촛점을 맞추고 있으면 해야 할 일이 뚜렷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가 내 앞에 놓인다 해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을 올바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방향을 잡아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분쟁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굶주림이 있는 곳에는 자선을, 아픔이 있는 곳에는 위로를, 외로움이 있는 곳에는 위안을 주는 것이지요.
결국 영성의 근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는 모든 것에 균형이 잡혀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이들은 모든 것에서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영성이라는 것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영’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는 단순한 동물이 아닙니다. 우리는 보다 고차원적인 존재입니다. 그래서 단순한 동물들이 살 듯이 살지 못합니다.
동물들은 본능에 따라서 충실히 생활합니다. 먹고 자고 하지요. 기분이 좋을 땐 좋고 나쁘면 나쁘고 그렇게 보다 단순한 삶의 패턴을 유지합니다. 하지만 인간은 참으로 미묘한 존재입니다. 마치 내면에 엄청난 공간이 있어서 모든 기억이 저장되고 우리가 원할 때면 그 기억을 고스란히 되꺼내어 재생시킬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아무리 기분 좋은 시기라도 내면의 공간에서 과거의 어두움을 꺼내면 고스란히 그 어두움에 사로잡히고, 반대로 아무리 힘든 일이 있어도 과거의 행복함을 되새기면 거기에 영향을 받습니다.
인간의 내면에 존재하는 이 영역(실제로는 ‘내면’이라고 할 수 없습니다. 왜냐면 인간의 내면을 아무리 해부해보아도 만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내적 차원이라고 표현하는 것이 더 바람직할 듯 싶습니다.)이 바로 우리 영이 지니는 일부의 기능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은 단순히 이 기능만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보다 방대하고 어마어마한 잠재력을 지니고 있는 것입니다.
인간이 인간인 이유는 바로 이 내면의 영역 때문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난 모든 존재는 이 ‘가능성’을 지니고 태어나는 것이지요. 하지만 가능성이라고 해서 모두에게 다 온전히 열려 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우리는 얼마든지 이 영역을 감추고 살 수도 있고, 반대로 활짝 열고 살 수도 있습니다.
영성이라는 것은 바로 이 영의 막대한 기능을 활성화하기 위한 하나의 활동이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래서 수많은 영성들이 존재합니다. 여러가지 차원에서 인간을 조명하는 것이지요. 뭐든 이름만 붙이면 다 영성이 되는 셈입니다. 생태계 영성, 진리의 영성, 몸의 영성… 심지어는 쓰레기 영성도 가능할 수 있습니다. 세상 것에 빗대어 내면을 관찰하고 내면의 영역의 가능성을 발견하고 확장하는 것이지요.
하지만 이런 여러가지 혼잡스러움을 넘어서서 단도직입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모든 영성은 ‘하느님’으로 통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하느님을 제외하고는 영성에 대해서 언급할 수 없습니다. 언급한다고 해도 엉뚱한 이야기만 늘어놓게 되지요. 모든 영성의 근본은 하느님이십니다. 왜냐하면 그분은 우리가 믿는 대로 ‘전능하시고 영원하신’ 분이시기 때문입니다.
인간의 영의 영역의 확장은 어딘가로 국한될 수 있는 성질의 것이 아닙니다. 마치 운동선수 가운데 수영을 잘하는 선수와 농구를 잘하는 선수의 종목이 다르지만 인간의 육체의 구조가 완전히 달라서 하나는 지느러미를 갖고 있고 다른 하나는 캥거루의 다리를 가지고 있지는 않은 것처럼 모든 인간의 영의 가능성은 모든 것에로 열려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보다 뛰어난 기능을 드러내는 것을 ‘카리스마’로 정의할 뿐이지요.
영성을 통해서 우리는 하느님에게로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방법이라는 것은 세상이 우리에게 전하는 것처럼 복잡 다단한 것과는 오히려 정반대의 방향일 수 있습니다. 하느님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만큼 복잡하신 분이 아닙니다. 뭔가 음흉하거나 엉뚱한 생각을 자주 하시는 분이 아니라는 말이지요. 하느님은 오직 하나만을 가르쳐 오셨습니다. 그것은 ‘사랑’이었지요. 결국 사랑을 잘 하는 사람은 영성을 완성시켜가는 사람입니다.
영성의 복잡성은 인간에게서 나옵니다. 우리 인간이 단순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하느님께서 살라는 대로 살지 못합니다. 우리는 우리 개개의 우주를 만들어 버리지요. 즉 우리 인간의 고유한 이기심이 이 영성을 지독하게도 복잡 다단하게 만들어 버리는 셈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원했다가 또 저것을 원했다가 하느님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가 또 반대로 돌아서서 달아나 버리기를 곧잘 합니다. 그러니 참으로 단순한 영성의 길이 각 사람에 따라서 그 복잡함을 더해가는 것입니다.
그럼 무엇을 해야 하는 걸까요? 각자에게 적합한 영성을 연구해서 매번 논문으로 쏟아내어야 하는 걸까요? 그럴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보다 단순한 중심으로 촛점을 맞추어야 합니다. 그것은 ‘하느님’이시고 그것은 ‘사랑’입니다.
우리가 하느님의 사랑에 촛점을 맞추고 있으면 해야 할 일이 뚜렷해지기 시작합니다. 아무리 복잡한 문제가 내 앞에 놓인다 해도 우리가 바라보아야 할 방향을 올바로 바라볼 수만 있다면 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하는 방향을 잡아내는 것은 크게 어렵지 않습니다. 분쟁이 있는 곳에는 평화를, 굶주림이 있는 곳에는 자선을, 아픔이 있는 곳에는 위로를, 외로움이 있는 곳에는 위안을 주는 것이지요.
결국 영성의 근본은 하느님이십니다. 하느님을 바라보는 이는 모든 것에 균형이 잡혀 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반대로 하느님에게서 멀어지는 이들은 모든 것에서 흐트러지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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